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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은선씨 Nov 28. 2024

다이어리 쓰고 가실래요?

구멍 숭숭 엄마 대처법

   

지독히도 쓰기 싫어하는 아이. 그게 나였다.


 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다이어리 쓰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 뒤엔 누구의 생일인지, 남자친구와의 100일은 언제인지, 언제 첫 키스를 했는지.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친구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록달록 스티커는 왜 붙이는 거지. 거기 그걸 붙으면 그 추억이 진짜 알록달록해지나. 빨간 동그라미 쳐놓으면 기다리면 그날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어차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올 때가 되면 오는 것을. 그렇게 소중한 날이면 이미 머릿속에 박제되는거 아닌가. 지나간 일 기록해 봐야 뭐 하나. 다시 돌릴 수 도 없는 걸. 오늘 좋았으면 그만이지. 내일 잘 살면 되지. 지나간 일 곱씹는 건 시간 낭비 자나. 왜 다들 미래를 꿈꾸어야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기록을 하지 않을 이유가 그때의 나에게는 심각히 많았다. 그래서 기록하지 않았고 내 머리는 너무 스마트해서 그것이 좋았던 일이든 싫었던 일이든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 허술한 소문자 T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부터  구멍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예방접종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 간호사언니들의 '쯧쯧쯧'을 유발하기 일쑤였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시절을 지나며 구멍이 조금씩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이곳들은 사인을 해서 보내야 할 서류, 준비물, 숙제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심지어 선생님들은 안 챙겨 보낸 나를 더 걱정해 주셨으니(왜 그렇게 친절하신 거야)  기록하지 않는 나의 삶이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둥. 첫째 아이가 학교를 입학하는 순간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해야 하는 설문조사와 싸인해야 하는 동의서는 많은지. 내 동의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 적이 있었나.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지. 시험은 없어졌다는데 평가는 왜 이렇게 많아. 뭘 자꾸 챙겨봐 달래.  현장체험 학습은 왜 이렇게 자주 나가지? 도시락은 왜 이렇게 자주 싸 오라는 거야. 운동회 안 한다며. 그런데 왜 부모와 함께 하는 명랑체육대회가 있는 거야. 학부모 봉사는 매 달 꼭 나가야 하는 거야? 참관 수업은 왜 하냐고요. 아니. 방과 후 수업 시간표는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그래도 첫째만 학교를 다닐 때에는 양반. 둘째가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미 첫째 아이 학교, 방과 후 수업, 학원 스케줄로 머릿속 테트리스가 무너지고 있던 나는 둘째 아이 스케줄까지 더해지자 구멍 난 테트리스에 폭탄이 빵 터져버렸다.  


 쓰지 않고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이게 내가 다이어리를 쓰게 된 이유다. 흩어진 나날들, 오래된 앨범의 추억, 그때의 웃음소리와 바람 냄새.. 같은 감성은 없다. 오직 구멍 내지 않기 위해 쓴다. 내일 아이들의 준비물을 빼먹지 않기 위해. 비싸게 끊은 줌수업 회비를 미참석으로 날리지 않기 위해. 학원 선생님께 보충수업 왜 오지 않냐는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학원 회비날도 덤으로 잊으면 안 되고.(왜 회비날이 학원마다 다 다른 거냐고) 모두가 보는 알림장에 우리 아이의 이름이 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현장 체험 학습 날 우리 아이만 도시락이 없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침부터 빨지 못한 체육복을 그대로 입고 가는 냄새나는 일을 막기 위해. 내 아이만 받아쓰기 준비 못해서 2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 오지 않기 위해서.


 아이를 위한 일뿐만이 아니다. 덜렁덜렁 덜렁이인 나는 뭐든 잘 잃어버린다. 한데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이 똑똑이가 기억을 못 한다. 기억을 해야 다시 찾아오든 할 텐데. 이럴 때 다이어리는 구명줄이다. 이 녀석은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알고 있다. 이 CC TV 같은 녀석.

 생활비를 정산할 때도 마찬가지다. 통장에 생활비는 들어왔는데 스쳐 지나가고 없다.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없다. 어디에 언제 썼는지 추적해서 이 발 없는 도둑을 잡아야 학원비를 같은 달에 두 번 내는 일이 없는 것이다.     


 둘째 아이가 1학년이 된 지 1년 여가 다 되어간다. 나의 다이어리 역사도 딱 그만큼이다. 이제는 다이어리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B사감보다 더한 녀석이 아침 이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서 써. 어서 쓰라고. 구멍 나면 안 되잖아

 이제 나의 아침은 이 녀석에게 나의 하루를 보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간별로 나열, 꼭 해야 할 일 기록, 아이들 마치는 시간과 학원 수업, 저녁으로는 뭘 먹을지, 숙제는 언제 하고, 책은 언제 읽을지. 그날 아침에 정해진대로 살아간다. 틀 안에서 사는 삶은 불안하지 않고 안정적이다. 다이어리를 쓰기 전의 삶은 내가 오늘은 무엇을 놓친 것이 없나 늘 불안했다. 물론 다이어리를 쓴다고 해서 다 챙기면서 살고 있지는 않다. 여전히 덜렁거리고 구멍투성이 이지만 10개 빠트렸던 것을 2개 정도만 빠트린다. 구멍이 좀 좁아졌다. 틀 안에서 나는  꽤나 안정적이다.      


귀찮음의 노예이며 게을러터지기로 단연 압도적인 구멍친구들.

들어와 들어와. 다이어리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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