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에 나는 태어났다.
10대, 친구들에게 내 생일을 알리고 또 알리고 다니면서 선물을 챙겨달라고 졸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이 없다.
20대, 친구들과 함께 예쁜 식당을 예약하고, 나만을 위한 작고 소중한 선물을 골랐다. 여전히 민폐스럽기 짝이 없다.
30대, 예쁜 아가와 듬직한 남편과 함께 단란한 우리 식구만의 생일 파티를 꿈꿨다. 정말 이상적이다. 물론 12월부터 시작되는 가족 행사를 준비하고 치뤄내기 바빠졌다. 그럼에도 남편과 함께 갖고 싶었던 선물 하나 고르는 일은 놓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선물 타령인가.
40대, 생일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때론 누가 생일을 기념하자고 했던가 하며 하늘을 향해 원망을 쏟아 내기도 했다. 도대체 생일이 뭐길래.
온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했던 것처럼 생일은 오롯이 나를 위한 날이었다. 그 말인즉슨, 나는 다른 이의 생일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생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던 내가 결혼 후 남편, 아이, 친정과 시댁 가족들의 생일을 챙기기 시작하니, 생일은 점점 다르게 다가왔다. 매년 겨울, 내 생일은 가족들의 연이은 행사로 채워졌다. 축하 대신 숙제가 되어버린 12월, 그 시작이 바로 내 생일인 것이다.
그래서 겨울이 시작될 쯤이면 설렘보다는 비장한 마음이 앞선다. 마치 수능, 아니 모의고사를 줄줄이 치러내야 하는 고2정도의 기분이랄까? 외동딸로서, 외맏며느리로서 어른들 생신을 잘 치러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 보기에 부족해도 직접 상을 차리거나, 몇 달 치 카드를 긁어 식당을 예약하거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 그렇게 나는 생일을 점점 싫어하게 됐다.
- 올해 생일에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 어. 조용히 지나고 싶어.
- 이번 생일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 어.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그냥 지내자. 곧 있으면...
점점 이런 식으로 내 생일을 맞이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 생일은 바라던 대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생일이 되면 축하 인사겸 안부를 나누던 소식들이 줄고, 이제는 어쩌다 회원가입으로 인연을 만들었던 쇼핑몰에서만 생일을 축하하며, 선물(쿠폰)을 보내온다. 그렇게 귀찮아하던 생일맞이가 사라졌는데, 어쩐지 올해는 좀 씁쓸해져 괜스레 허전한 마을을 달래려 생일의 의미를 찾아봤다.
'자아와 존재의 축하'.
생일은 자기 자신과 삶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처: ChatGPT4 o)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삶을 축하하며, 나의 과거와 나의 미래를 기념하는 날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의미였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줄곧, 생일잔치에 얽매여 나만 즐겁거나 혹은 내가 내 부담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기념식만 쫓다 제 풀에 제가 꺾인 나머지 제대로 된 생일을 경험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게 누구의 생일이든 간에 말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족과 친구를 만나게 됐다는 감사함과
남은 삶에 대한 의지만 있어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사실 글을 쓰기 전에는 잊힌 생일을 맞이한 40대 엄마로서 생일 축하 댓글을 받아 보고 싶다는 엉뚱한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신나는 생일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차분히 내 삶을 계획하는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님들께도 다가올 생일에 자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삶을 계획해 보시길 살짝 전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