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네가 과연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결코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던 그날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조명, 온도, 습도 그리고 그녀의 머리 뒤로 마주한 풍경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질문일까?
안쓰러움이 동반된 우려였을까?
글쎄다. 그 의중이 순수한 궁금증과 걱정이 아니었으니 내가 긁혔겠지.
화자의 비언어적인 메시지는 청자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고들 한다. 내 기억 속에 그녀의 표정은 분명 ‘의심 두 스푼에 비아냥 한 스푼’ 곁들인 눈빛과 입꼬리로 각인되었다.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는 건, 결국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무수히 던졌으나 어떠한 답도 찾지 못한 질문이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아이가 벌써 34개월 되던 즈음이었다.
입소하기로 한 어린이집은 신규 개원을 앞두고 있었고, 그에 시기를 맞춰 일자리를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소심하고 도전을 두려워했던 터라 고용시장에 매물이 되어 내딛는 그 한 걸음이 참 어려웠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사무직 경험과 짧은 학원 강사 경력. 탄탄하지 못한 커리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남편의 발령으로 제주에 내려왔다. 이주와 동시에 겪게 된 임신과 출산, 육아로 4년이란 시간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별다른 경력 없는 내가, 연고 없는 제주에서, 과연 경력 단절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나란들 의심하지 않았을까.
자려고 누웠을 때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그때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 분하다. 그 순간 할 말을 잃고 실없이 웃어버린 내 모습이 너무도 바보 같아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보다는 오기가 먼저 발동했다.
‘두고 봐라, 내 어떻게든 여기서 취업한다. 해버리고야 만다.’
‘네가 뭔데 날 판단해?’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분노를 동력 삼아 사람인, 잡코리아, 워크넷에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에 맞춰 출퇴근이 가능한 채용공고를 추렸고 일단 이력서부터 제출했다. 4년간의 공백이 신경 쓰였지만 나라는 사람의 시장 가치는 합격, 불합격이 말해주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불합격이면 예상했던 결과일 테고, 합격이면 예기치 못한 경사일 테니까.
반쯤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시간은 흘렀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한 달째 적응 중이었다.
오전 돌봄만 하고 하원한 아이와 함께 낮잠이 들어버린 어느 날, 오후 3~4시 즈음이었을까.
'브르르르---.'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오는 전화는 070과 1588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일 텐데 하는 생각에, 힘들게 재운 낮잠이 깨버릴까 다소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OOO 씨 되시죠? 안녕하세요. 여긴 ◇◇호텔입니다.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내일 면접 보러 오실 수 있나요?"
“네에??? 면접이요? 자, 잠깐만요!.”
순식간에 달아난 잠에 맑아진 정신을 붙들고, 입가에 눌어붙은 자다 흘린 침 좀 닦고, 예의에 상냥함까지 갖춘 사회생활 모드로 태세를 전환했다. 흠흠, 목소리도 가다듬고.
“네네! 됩니다! 몇 시까지 가면 되나요?”
전화를 끊자마자 밀려오는 벅찬 고양감. 기대 없이 산 로또 복권이 3등에 당첨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기회는 왔고, 이제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다. 얼마 만에 맞이하는 면접인가.
면접 의상을 고르고, 예상 질문에 대비해 회사 정보를 수집하면서 이미 합격이라도 한 듯 설렘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돌이켜보니 우스운 건, 그 누구보다 내 가치를 의심하고 물음표를 던진 사람은 정작 나 자신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때의 오기가 워킹맘의 물꼬를 터준 기회였다. 일이 잘 풀리고 보니, 한결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그날의 상황을 되짚어본다.
분노한 지점이 너의 지적 수준이고, 반박한 지점에 너의 결핍이 있다
-김종원 작가-
‘의심+비아냥’으로 각인됐던 그녀의 표정은 당시 엄마이자 아내로서 역할을 국한할 수밖에 없었던 내 존재감, 타지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이 빚어낸 비뚤어진 시각이었을지도.
실은 지나온 시간들이 채용 시장에서 매력 없는 물경력임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려웠음을.
육아와 가사 이외에 생경한 일을 안온한 일상에 자리 한켠 내주기가 버거웠음을.
이 모든 걸 솔직히 인정하고 나니, 도리어 감사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과감히 이력서라도 던져놓고 보자, 일단 ‘하면 해’의 마인드를 탑재하게 해 준 그녀에게.
만약 최종 합격하지 못하고 면접에 그쳤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도 1차 서류 통과라는 가능성을 부스터 삼아 계속 도전했을 것이다. 오기로 시작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온몸으로 부딪힐 정도의 각오였는데 말이다. 시행착오를 경험할 새도 없이 예상보다 빨리 얼떨떨한 마음으로 워킹맘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재앙이라 했던가. 재앙이었는지, 천운이었는지는 두고 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