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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여사 Nov 17. 2024

슬기로운 작가생활

나는 작가다.

호칭이라 함은 이름 지어 부는 일이기에, 누군가 나를 작가라 불러주는 이만 있으면 작가다. 비록 글솜씨는 비루할지라도.


나는 요즘 꽤 많은 분들께 "작가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매일 카카오톡 톡방에서 글로만 듣던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특정다수를 부르는 것이었기에 전혀 실감 나지 않았었는데, 오늘 나를 실제 음성으로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분들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호칭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아이가 태어나 사람들이 나를 '엄마'라 규정짓고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사실 나는 엄마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엄마가 되었다. 그 엄마의 역할에 맞게 삶의 패턴을 바꾸고 엄마의 세계로 들어갔다. 

작가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삶의 패턴도 조금 달라지고 있다. 일단 뭐든 쓰고 있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화나게 하고 기운 빠지게 하는 모든 일들이 일단 글감이 되어 머릿속에 저장된다. 며칠 전에는 5살 딸아이와 10살 아들이 다투길래 평소같았음으면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르고 봤을 테지만 순간 드는 생각.

'어랏? 그래, 한번 싸워봐라. 글로나 써보게. 갈 때까지 가봐 어디.'

하하, 엄마의 마음보다 작가로서의 마음이 앞섰다.


또 하나 더. 이번 겨울방학에 아이들과 베트남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사실을 남편은 아직 모른다. 남편은 바빠서 같이 못 갈 것이 뻔하기에 래 일단 티켓을 질러놓은 상태인데, 왠지 일하는 남편만 두고 우리끼리 놀러가는게 미안해서 티켓을 취소할까 하다가 떠오른 생각.

"베트남 여행 이거 엄청난 글감인데. 취소하면 글감 하나.. 아니 몇 개쯤 날아가잖아."

항공권티켓 취소보다 글감 취소가 더 무섭다니. 단단히 작가병에 걸렸나 보다.


이쯤 되면 뭐 대단한 작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분들은 나의 동기들이시다. 내가 작가생활을 하는 건 우리 남편도, 아이들도, 친정엄마도 모르는 1급 비밀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구구즈처럼 내게도 슬기로운 작가생활을 함께 하기로 한 동기들이 있다. 바로 이은경작가님과 함께하는 슬초 브런치 3기.



어제는 슬초 브런치 작가들의 오프라인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참석 드레스코드는 그린. 잠들기 전 급하게 쿠팡 새벽배송으로 주문한 초록색 머플러를 아침에 뜯어보니 냄새가 장난 아니다. 이걸 그냥 두르고 갔다가는 내 주변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 불상사가 생길 것만 같아서 페브리즈를 뿌리고 스팀다리미로 8천 원짜리 머플러를 곱게 다림질해 본다. 그뿐이었겠는가. 평소에는 하지 않던 눈화장도 하고, 먼지 쌓인 다이슨 에어랩을 꺼내 머리도 만졌다. 남편은 아침부터 일어나 부산을 떠는 나에게 왜 그렇게 신난 거냐며, 그 작가가 차은우, 변우석 정도 되는 거냐며 나를 보며 계속 웃는다. 남편에게는 일단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하는 정도로 말해두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걸. 지금 내가 설레고 신나고 반쯤 붕 떠있는 건, 작가님도 작가님이지만 나를 작가로 불러주는 다른 동기분들을 만나러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향형인지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겁내고 두려워하고, 먼저 입도 뻥끗 못하고 쭈뼛될 나 자신을 너무 잘 알지만.(실제로 그랬다. 먼저 인사해 주시고 말을 건네주신 고마우신 동기님들.)


그렇게 (아직 페브리즈 냄새가 빠지지 않은) 초록색 머플러를 손에 꼭 쥐고 대학교 강의실 같은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이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단체 미팅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내 옆에는 누가 앉을 것인가. 두근두근. 첫인사는 어떻게 건넬까. 두근두근.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긴장만 하고 있었던지라 집에 돌아오지 마자 주저앉고 말았다. 차은우, 변우석 팬미팅쯤 되는 행사를 다녀와 뻗은 아내에게 다정히 치맥을 건네는 남편이 묻는다.


"그래서 오늘 어땠어?"


"여보. 오늘 작가님이 그러시더라. 글 쓰면 예뻐진다고. 그래서 나 오늘부터 글 써보려고. 작가 돼 보려고."


"아.. 그래? 잘해봐. 풉" (그 뒤에 숨은 비웃음을 나는 보았다. 너 두고 봐라.)


드디어 남편에게도 커밍아웃을 했다.


오늘 작가님이 말씀하셨다. 글을 쓰면 예뻐진다고. 사진으로 인증도 하셨다(사실이었다....)

그래, 나이 마흔에 예뻐진다면 못할 게 없지!  지금부터 예뻐지기 위해 열심히 써보겠다. 나는 선생님 말씀은 죽어도 잘 듣는 모범생출신 아니던가. 비록 글을 제일 잘 쓰지는 못할지라도, 열심히 꾸준히 써서 예뻐져야지. 얼핏 보니 미모도 글쓰기 수준도 다행히 바닥이니 내가 제일 격변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동기분들, 저의 미모 격변을 기대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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