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잘 쓰지는 못하지만 매일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고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것은 글감을 정하는 일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난 후, 나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내 일상 속에서 조금 특별하고, 웃기고, 독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내놓을만한 글감을 찾으려 애쓴다. 그렇지만 내 인생의 다른 것들이 그러하듯,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쉽게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슬초 브런치 3기 동기들과의 채팅방에서 글감과 관련된 대화를 보고는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은 글감들이 집에 있어서 글을 못쓰겠어요."
"우리 집 글감들은 아침부터 싸우고 있네요."
"여러분! 글감들이 없는 월요일입니다"
엄마라면 한 번에 눈치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감들이 누구인지.
이런 재치 넘치는 동기를 둔 덕분에 오늘 글감을 날로 먹어보려 한다.
먼저 나의 글감 후보 1번. 남편.
남편과 나는 27살에 만나 3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복잡하고 예민한 나의 정신세계와는 달리 무던하고 편안한 성격과 안정된 직장에 끌려 연애를 시작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연애가 지겨워질 무렵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비록 서로가 부모가 되어가는 성장통을 겪느라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들로 쏟아부으며 상처를 남기기도 했으나 이제는 완벽한 세트플레이로 맞벌이부부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어딜 가나 있을법한 평범한 외모에 보통의 체격, 40대 남성 평균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K직장인이며 적당히 가정적이고 적당히 회식을 즐기는 남편은 너무나도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 1호이기에 딱히 글감이 될 수 없다. 탈락.
두 번째 글감 후보는 딸.
첫째를 낳고 3년간의 육아휴직(독박육아 아니지 독점육아)으로 육아의 쓴 맛, 매운맛을 경험하고는 둘째는 없다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 나는 그 참담하고 고독스러웠던 육아의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첫째가 6살이 되던 그 해 둘째를 가졌다. 5살 터울의 늦둥이인데 다기 딸이라니 그저 예쁘다. 첫째와는 달리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우지 않고 뭘 먹어도 뭘 해도 그냥 내버려 둔다. 발로 키운 아이의 정석. 둘째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하면 "미안하다. 사랑한다."정도로 끝날 것 같아 글감으로는 탈락.
세 번째 글감 후보 아들.
아들을 두고 글을 쓰라고 하면 나는 매일 한 편씩, 아니지 어쩌면 네댓 편도 쓸 수 있을 만큼 에피소드가 넘쳐난다. 나에게 인생의 희, 노, 애, 락을 모두 맛보게 해 준 나의 아들.
좋아, 너를 글감으로 엄마가 글을 한번 써 볼게.
너는 허니문 베이비였다. 하와이 신혼여행에서 남편과 농담 삼아 "우리 허니문베이비가 생기면 태명을 하비(하와이베이비)로 짓자 ㅋㅋㅋㅋ"하며 나눈 농담이 현실이 되었지. 아빠 엄마는 그때 주말부부였단다. 엄마는 너를 낳기 두 달 전까지 15평 원룸에서 혼자 지내며 뱃속에서 너를 키웠었어. 그래도 신혼시절이었고 너를 품고 있다는 기쁨과 설렘이 있어서 혼자 있어도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구나. 그렇게 만난 너는 건강하게 태어나질 못했다. 신장이 1개만 있는 선천성 단독신장으로 판정을 받아 돌 전까지 종합병원을 이리저리 다니며 아빠, 엄마의 마음을 애끓게 했지. 건강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부모에게 행복과 안정감을 주는지 엄마는 너를 통해 깨달았어.
네가 태어나고 다른 집들과 비슷하게 우리도 매일매일이 육아전쟁이었다. 엄마는 너를 먹이고 재우고 보살피는데 엄마의 시간을 다 쏟아부어야 했었지. 하지만 아빠는 달랐어. 아빠는 여전히 출근을 했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칼퇴해야만 했지만) 너를 낳기 전의 삶과 크게 변하지 않았지. 엄마는 그 지점이 가장 속상하고 화가 났었던 것 같아. 엄마는 매일 아빠에게 서운했고 그 서운함은 표정과 말투로 드러났을 테고, 우리는 연애 3년 동안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자주 다투었단다. 그렇게 너는 나에게 그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부부싸움'의 세계도 알려주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참 많이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안 좋다는 건 무조건 못하게 하는 그야말로 '육아의 정석'과도 같게 너를 키웠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도 참 나 같은 엄마를 만나 어릴 때부터 고생이 많았다. 조금 느슨한 엄마였으면 너도 나도 편했을 텐데.
유튜브는 절대 금지. 하루에 책 10권은 읽어주기. 무엇이든 엄마표. 엄마표 수학놀이, 엄마표 미술놀이, 엄마표 숲체험, 엄마표 영어. 무슨 엄마표가 그렇게나 많은지 이건 엄마표가 아니라 엄마고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마고생을 하면 네가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란다고 하니 못할 것이 없었지. 자신감 넘치게 시작했던 엄마표, 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약했었어. 책을 읽어주면 너는 블록을 가지고 오고, 워크북을 펼치면 낙서를 마구 해대고, 바깥나들이를 나가려고 하면 놀이터로 빠지기 일쑤였지. 엄마는 매일 엄마표를 계획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날들을 반복했었어. 파워 J형이었던 젊고 패기 넘치던 엄마는 너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이는 잘 큰다'라는 걸 깨닫고 육아에 있어서 만큼은 이제 완벽한 P로 바뀌었지.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던데 너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바꾼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엄마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아빠에게 말했었어.
"이 아이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야"
엄마는 너무나 평범했고 잔잔했던 나의 인생이 별 볼일 없게 느껴질 때가 참 많았었어. 어쩌면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오직 세상의 중심이 나 하나뿐인 어리석은 인간이었지. 너를 낳아 키우면서 엄마는 사람에 대해, 인생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있다. 엄마는 너를 키웠지만, 엄마를 어른으로 키워준 건 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엄마의 모습이 참 마음에 든다.
못나고 이기적이고 예민했던 나를 망가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나의 구원자.
아들아, 네가 열어준 세상 덕분에 비록 힘들고 고될 때도 있지만, 매일매일이 새롭고 행복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