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8시면 아이는 책상에 앉아 그날의 공부를 시작한다. 공부는 수학 문제집 풀기와 영어 숙제. 영어 숙제는 학원에서 배운 내용의 복습인지라 스스로 잘하는 편이나, 아직 학원의 도움 없이 엄마와의 공부로 채우는 수학은 아들에게는 괴로운 시간이다.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등의 짜증으로 나를 박박 긁으니 나도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고, 어제저녁 공부도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한채 마무리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아들의 장점 중 하나는 엄마의 잔소리도 금방 잊고 뒤끝이 없다는 것이라 공부 후 게임 한 판을 하고 금방 기분이 풀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투정을 부린다.
아빠가 옆에서 같이 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은 한 방에서 각자의 침대에서 잔다)
아빠에게 같이 자자고 몇 번 말했으나 거절당한 아이는 불을 끄고 누워 숨죽여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을 듣는 순간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 또한 부모에게 서운했을 때, 나의 서운한 마음을 부모가 무시했을 때 혼자 이불 덮고 소리 내지 않고 많이 울었었지. 아빠,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보다 더 속상한 건 내가 서운하다는 마음을 표현했음에도 그 감정을 보듬어 주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내가 바랬던 것은 우는 나를 꼭 안아주는 엄마였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엄마가 되어 나의 어릴 때 마음과 똑같을 아들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모르는 척 잠을 청했다.
물론 마음은 아들을 안아주고 토닥여주며 속상한 마음을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피곤했고 귀찮았다.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자려고 누웠는데 다시 몸을 일으키는 건 진짜 괴로운 일이다. 이럴 때 보면 본능은 모성보다 강하다. 거기에 조금의 핑계를 덧붙이자면, 이제 열 살이나 되었으니 그 모든 감정들을 엄마가 하나하나 감싸줄 수 이는 없는 일. 이 정도의 감정은 스스로 다스리면 될 일이라 여기면 된다고 내 행동에 정당성을 억지로 부여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나의 어린 시절들.
어릴 적 학교가 끝나면 할머니집으로 향했던 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EBS방송을 켜놓고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던 나, 엄마의 사랑이 고파 "엄마는 내가 더 좋아? 동생이 더 좋아?" 매일 물어보던 나. 예민하고 감성적이었던 나는 아무리 채워주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부모님의 사랑을 원망하며 자주 울었었다. 오죽했으면 대학생 때까지 일기장에 "나를 가장 울게 하는 사람은 엄마"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으니. 그때의 눈물을 아빠, 엄마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는 것을, 혹은 귀찮고 피곤하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이유로 우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는 것도 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이지 '나'를 키우는 일이다.
몇 해전 한 프로그램에서 '어린 시절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모두가 부모님과 관련된 어린이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중 유시민 작가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 아무렇게나 잠들어 있으면 아빠가 와서 나를 안아 들어서 이불 위에 눕혀주셨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잠이 깼어도 잠이 든 척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가질 법한 사소한 기억이기에 모두가 공감했고,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는 나를 안아서 눕혀주었던 부모님, 잠든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기억,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나에게 베개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던 기억. 이런 기억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이지만 그 순간에는 누구나 마음속에 차오르는 행복을 느낀다. 그 행복은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오는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그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우리 아들 모두가 같을 것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는 것.아이의 마음속의 저장되는 사랑의 형태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럼 이제 아이에게 그 사랑을 보여줄 때.
우선, 내일부터는 혼자 흐느껴 울 때 꼭 안아주어야겠다. 모성이 본능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말아야지! 실은 이 글을 쓰는 이유 또한 엄마의 반성이자 다짐을 위한 것이다.
먼 훗날, 아이들이 내 나이쯤 되어 지난 시절을 되돌아볼 때, 엄마에게 받았던 사랑의 기억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 짓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