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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여사 Nov 03. 2024

놀아 볼 결심


 우리 아들은 잘 논다. 어떻게 저렇게 놀 수 있나 싶을 만큼 혼자서도 잘 놀고, 친구들이랑은 더 잘 논다. 학교가 끝나고 이어지는 학원 스케줄을 마치고 나면 4시 무렵.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엄마, 놀다가 들어갈께."

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


매일 6시가 넘는 시간까지 축구하고 놀이터에서 뛰어 놀다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집에 들어온 녀석의 첫 마디.

"아.. 더 놀고 싶었는데..."

잉? 나오는건 한숨 뿐.

잔소리는 속으로 삼킨다.

'어휴, 뭐가 되려고 저렇게 놀기만 하는거야.  시간에 책이나 좀 읽지.'


그런데 신나게 놀고도 더 놀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들을 볼 때면 또 한편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뿌듯함이 있다.

"세상 사람들, 이리 좀 와 보세요. 이렇게 잘 노는 아들이 제 아들이랍니다."

마이크를 붙들고 자랑하고 싶다. 이건 정말이지 아들이 수학 심화 문제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스스로 다 풀었을 때와 같은 결의 뿌듯함이다.

물론 아들은 혼자서도 잘 논다. 아침형 인간인 아들은 주말에도 어김없이 7시쯤 일어나 혼자 거실에서 레고 조립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며 우리를 깨우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알차게 즐긴다.

"엄마 심심해."

 이 말은 우리 아들 입에서 "엄마, 공부가 정말 재밌어!"보다 나오기 힘든 말이다.


나는 이렇게 잘 노는 내 아들이 정말이지 부럽다.

나는 잘 놀 줄 모른다. 아니 놀 줄을 모른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제대로 못 놀아 본 나는 단지 '노는 것'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게 아까워 감히 놀지 못한다.


육아에 지치고 직장일에 지친 어느 날에는 놀아볼 결심을 단단히 하고 남편에게 선언한다.


"오늘은 진짜 제대로 놀아볼테야! 나 찾지마."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오지만 작 나의 놀이는 카페에 앉아 책 읽기, 서점에서의 책 쇼핑으로 끝내고 저녁이 되기 전 집으로 돌아온다. 이 지긋지긋한 귀소본능.




얼마 전 배우 한가인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탁 꽂히는 그녀의 한마디.

"저는요, 얼마나 답답하냐면 새장 속의 새 같이 살아요. 새장이 없으면 스스로 새장을 만드는 스타일이에요."

앗 이건 내 얘기인데.

닮은거라곤 1도 없는 한가인님과 나는 이 꼭 닮았구나. 이왕이면 겉모습도 좀 비슷하지. 하다못해 콧잔등의 매력점이라도.


 나 역시 내가 만든 나의 울타리 속에서만 살아간다. 내가 만든 울타리는 엄마, 아내, 선생님이라는 나의 역할로 세워진 울타리이다. 그 역할을 벗어나는 시간과 행동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울타리 밖으로 발을 한 발짝이라도 디디면 나는 나를 억지로 다시 울타리 안으로 집어 넣는다.

"정신차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그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여행이다. 나는 여행가서 남들처럼 스케줄을 짜서 관광을 하거나 맛집을 가거나 하지 않는다. 숙소 부근 적당히 걸어다닐 수 있는 식당과 카페, 아이들과 뛰어놀고 산책할 정도의 장소만 찾아두고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울타리가 없기에 내 마음대로 놀 수 있다.

세 끼 밥도 안 해도 되고, 과자를 마음껏 먹어도 되고, 아이들 숙제도 안봐줘도 되고, 책도 안 읽어줘도 되고,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봐도 된다. 매일 맥주와 와인을 마시다가 잠들곤 한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나는 스스로 울타리 속에 들어간다. 


이토록 완벽한 스위치라니.

스위치마저 없었더라면  삶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마냥 생기없이 꽃도 못 피운채 울타리안에 쳐박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말인 오늘도 아들은 10시에 친구들과 풋살장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손흥민 풀착장을 하고선 축구공과 함께 사라졌다. 너무 완벽한 가을 날씨덕분에 오랜만에 놀아 볼 결심을 하고 점심 먹으러 들어온 아들에게 한 마디 건넨다.


"오늘은 완전 가을이네. 집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날씨니까 밥먹고 공원 산책 가자"


"나 집에만 있을거 아닌데. 이따가 애들이랑 포켓몬카드 챙겨서 다시 모이기로 했어. 난 나가서 놀테니까 아빠랑 갔다와."


아들아. 넌 노는거엔 완벽한 계획이 있구나. 멋지다. 아들아.


이젠 내 품을 벗어나 친구들과 노는게 더 재밌는 아이에게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아서 공원에 가는 척하며 뒤따라 나섰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붉은빛 나무들로 둘러싸인 풋살장. 그 안에서 맑디 맑은 얼굴로 친구들과 뛰어노는 아들. 그것이야말로 내겐 완벽한 가을 풍경이었다.


엄마의 '놀아 볼 결심'은 오늘도 실패였으나

못 노는 엄마에게서 잘 노는 아들이 나왔으니 그래, 그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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