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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여사 Oct 28. 2024

치과가 무서운 나이, 마흔짤.

 며칠 전 밥을 먹다가 혀끝에 걸리는 뾰족한 느낌. 이런.. 감이 좋지 않다. 오래된 경험으로 촉이 딱 왔다. 이건 치아 어딘가가 깨졌을 때 느껴지는 감각. 불안하게 혀끝을 돌리며 상태를 확인하고는 좌절하고 만다. 

 아, 또 지옥 같은 그곳에 가야 하는구나. 마흔이 된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 절대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 바로 치과이다. 내가 꾸는 몇 가지 악몽 중 하나가 이가 썩는다거나 이가 빠지는 것에 관한 꿈인데 이런 꿈은 '치과'와 관련된 내재된 나의 불안감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양치하는 걸 그렇게도 싫어했다. 양치하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기는 일쑤였고, 계속된 잔소리가 듣기 싫어 내가 했던 부렸던 꼼수들. 하나, 칫솔질을 다섯 번도 채 하지 않은 채 대충 마무리. 둘, 양치 안 해놓고는 했다고 거짓말하기. 셋, 양치했다는 증거만 남기기 위해 칫솔에 물만 묻혀두기. 대체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하면 양치를 안한걸 엄마에게 들키지 않을까 머리만 굴렸을까. 그 시간에 차라리 양치를 하지. (정말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매일 세 번 꼬박꼬박 양치를 하리라.) 그래서 어릴 때부터 치과는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었고 치과에서의 끔찍한 치료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기에 아파도 참고, 시려도 참고, 부어도 참다가 최악의 상황에 맞닥트려서야 치과에 발을 들여놓곤 했다. 정말이지 악순환의 연속인 시절이었다. 

  

 그러던 내게 자발적으로 치과에 들어간 경험이 있었으니 그건 내 인생 몇 안 되는 충격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고등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느 날처럼 평소와 같이 대충 양치하고 화장실에 나와 학교 갈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아빠가 양치하는 모습을 보게 된 나.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아빠가 지금 양치를 마친 그 칫솔은 조금 전 내가 썼던 칫솔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같은 칫솔은 쓴 건 아닐 테고, 보통 식구들끼리는 칫솔을 구별하기 마련이니 아빠와 나 둘 다 같은 빨간색 칫솔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달려가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아빠가 왜 내 칫솔을 쓰고 있냐고 마구마구 따져 들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당시 나는 사춘기 절정에 다다른 여고생이었고 나는 아빠와 '생존의 언어'만 주고받는 것이 내 나름의 반항의 표현방식이었기에 아빠와 주절주절 칫솔과 관련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꾹 참은 채 아빠가 나온 화장실에 들어가 그 칫솔을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분노를 담은 칫솔질을 했다. 그건 양치가 아니라 소독과 같았다. 내 입안에 있는 아빠의 충치 세균을 모두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의지를 담은 입 안 소독. 입 안 소독만으로 그칠 수 없었기에 나는 그토록 무서워하던, 두려워하던 치과에 자발적으로 가게 된다. 아무렇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마음의 평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와 일정기간 동안 같은 칫솔로 양치를 했다는 것이 내 치아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씩 충치가 생겨 치과에 갈 일이 생기면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곤 아무 잘못도 없는, 아직까지 자신이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아빠에게 분노 먼저 솟아오른다. 

 "아빠는 그때 왜 내 칫솔을 써서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충치가 생기게 하는 거야!"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의 양치 인생은 달라졌다. 매일 하루 양치 3번은 기본이고 주기적인 스케일링과 검진으로 나의 치아를 사수해야만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별다른 치아 문제없이 살아오고 있다. 만약 그날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마흔이 된 지금까지 양치를 귀찮은 행위쯤으로 인식하며 억지로 억지로 해왔을지 모르지. 그리고 살아남은 치아가 몇 개 되지 않았을지도..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내 치아의 구세주는 아빠의 칫솔이었구나. 돌이켜보니 참 다행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내 인생에 예고없이 터져버린 일들은 그 순간에는 단면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곱씹어보면 그때는 보이지 않던 다른 면도 보이게 마련이다. 아빠와 같은 칫솔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은 분노와 좌절만이 전부였지만 그로 인해 나는 양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습관을 가지게 된 것처럼. 힘들고 고되던 아빠와의 유럽 여행 역시 아빠가 내게 주신 사랑과 다정함의 표현의 방식이었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되었다.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내 인생의 굵직한 선택 역시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결정지을 수 없는 생각의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겠지. 

 마흔이 넘어 충치 때문에 치과 진료의자에 누워 떠오른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삶을 생각하게 하고 이렇게 또 하나의 글도 쓰게 했으니, 끔찍했던 아빠와 공용 칫솔에 대한 기억은 이제는 고맙고 다행스러운 기억으로 다시 포장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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