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교보생명 글판 도전기

불성실하게 거장과 맞서기

by 비읍비읍

2025년 1월 지금,

광화문이나 신논현 길을 가다 보면 벽돌색 건물에 굉장히 큰 글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024년 겨울편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유희경 ㅣ 대화



이건 교보생명에서 주최하는 교보문고 글판이다. 홍보부에서 하는 일로 알고 있다.

언젠가 내가 슥 적어내는 글귀가 이곳에 걸려서 100만 원 상당의 상금을 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쓴 글이 큼지막-하게 걸리는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명품브랜드 광고를 하거나, 대외적인 옥외광고를 할만한 브랜드를 광고하게 되면 본인 얼굴이 직접 걸리는 경험을 하지 않던가?

그걸 나는 나의 글로써 이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2023년 어느 봄날에 집을 나서는데 개나리가 멋들어지게 자라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시적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작은 이렇게 번뜩이는 곳에서 탄생하는 것이지! 하는 생각으로 지하철을 타기 전에 급하게 핸드폰을 열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적어보았다.


거진 3개월의 탈고 끝에 결정된 나의 보석 같은 문장은 아래와 같았다. 이것은 오롯이 광화문 글판에 응모하기 위함이었다.


1. 산수유로 포문을 열고 터져나온 봄이 묻어 담벼락에 개나리가 한가득

2. 3월이 울리며 봄이 펑하고 터져나와 담벼락에 봄이 한가득 묻어 개나리

3. 개나리 // 소리없이 펑하고 터져나와 담벼락에 한가득 묻은 봄


이젠 됐어! 하고 광화문 글판 봄 편에 응모하려고 했는데, 봄 편의 응모는 지난겨울에 이미 공모가 끝나는 구조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년도 글판에 선정되는 것을 노리며 더욱 갈고 닦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1년을 묵혀두다가 다시 접수를 해봤다.



결과는 광탈! 그냥 탈락! 아쉬운 우수상도 아니고 그냥 탈락!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답노트를 작성해 보듯, 역대 수상작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그런데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미 출간된 시집이나 소설 등에서 내용을 발췌해서 올린 것들이 공모전에 발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대 수상작들의 패턴을 알게 되고서는 약간은 상심했다.

발췌해서 적어낸 작품이 당선될 경우 상금이 50%에 불과한 것뿐만 아니었다. 애초에 내 글이 걸리는 기쁨은 전혀 느낄 수가 없는 앙꼬 빠진 단팥빵 수준, 아니 홍철없는홍철팀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게 아쉽지만 역대 수상작들을 보면 나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긴 하다. 6부 리그에 간헐적으로 출전하는 선수가 왜 나를 벤치에 앉히고 음바페를 선발로 기용하냐고 따질 수 없듯이 말이다.


2022년 겨울편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속을 걷는다

진은영 ㅣ 어울린다


2023년 봄편

다사로운 봄날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꼬옥 팔짱을 끼로

아장아장 걸어간다

김선태 ㅣ 단짝


2023년 여름편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안희연 ㅣ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2023년 가을편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신달자 ㅣ 가을 들


2023년 겨울편

발꿈치를 들어요

첫눈이 내려올

자리를 만들어요

이원 ㅣ 이것은 사랑의 노래


2024년 봄편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김선우 ㅣ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2024년 여름편

미소 짓는 너의 얼굴은

여름날 장미꽃처럼

가장 따분한 곳까지

향기롭게 해

캐서린 맨스필드 ㅣ 정반대


2024년 가을편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윤동주 ㅣ 자화상




그래도 나는 내가 작성한, 내 지문이 깊게 담긴 글이 광화문 글판에 선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것이 큼지막하게 출력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다가다 볼 수 있는 기가막힌 글귀를 적어내고 싶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지만, 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아보도록 해야겠다.


그날이 오면 너무 즐거울 것 같은 망상에 벌써 반쯤은 기분이 좋아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에게 글쓰기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