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디지털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수많은 질문도 받고 요청도 받는다. '이 그림 말고 다른 거 그리면 안 돼요?'라는 수업 자체를 거부하는, 본인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꼭 같은 색상이어야 하나요? 동그라미 말고 별은 안 돼요?라는 수준의 요구사항에서 그친다.
아무렴, 어떻니. 우리가 입시 미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리고 싶은 거 그리렴. 대신 오늘 가르쳐줄 기능을 이용해서 그려보자. 알았지?
수많은 요청사항 중에서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 있다.
"아이패드가 없는데요, 갤럭시탭으로 해주세요. 선생님"
이건 뭐랄까. 나에게 있어서는 '잔에 물을 따를 테니 포도주가 가득 차게 하거라'라는 요구사항과 같다. 다른 기기에서도 드로잉 가능한 앱이 있긴 하지만, 나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그 기기 안에서도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어플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이 어플은 회사의 신념인지 출시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안드로이드 버전을 만들지 않고 오로지 iOS, 즉 아이패드만 지원하는 중이다. 이 어플을 쓰기 위해서 아이패드를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애플은 이 회사에 감사패라도 하나 만들어 보내야 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나는 이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어플로 그림을 그리고 있고, 따라서 수업도 이 어플로만 진행을 한다.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선 같은 태블릿 PC고, 펜슬로 끄적이는 거니까 일단 드로잉 어플 받아 켜놓으면 수업이 가능하겠다 생각하실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돌려보낸 수강생만 수두룩하다. 그때마다 송구스럽다. 안 되는 사유를 설명해 드리고 같이 안타까워해 드리는 건 물론, 또 어쩌다 화내는 분들께는 죄송하다 굽신 거리기도 한다.
처음 강의를 시작하면서 교육팀에도 신신당부를 드렸다.
수강 준비물에 꼭 기재해 달라고.
이건 아이패드로 그려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어플, 이거 이 어플 보이시죠? 이거 설치해야 그릴 수 있어요. 이 어플은 유료고요. 이 어플 돈 주고 산다고 저한테 뭐 떨어지는 거 없어요. 한번 사두면 애플이란 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평생 무료예요. 저는 만 얼마에 샀었는데 아마 가격이 더 올랐을 거예요. 지금은 얼마인지 제가 확인해 보고 현재 가격 알려드릴게요. 아무튼 수강하려는 학생은 꼭 이 어플을 다운로드한 상태에서 들어와야 수업을 들을 수가 있어요. 잘 모르시겠으면 그냥 이런 문의 들어올 때 제 연락처 넘겨주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수강신청은 매월 셋째 주 즈음에 시작을 할 수 있고 준비물란에 아래의 문장이 들어갔다.
'준비물 : 아이패드, 펜슬, 프로크리에이트 어플(유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패드 대신 다른 기기를 가져와 이걸로 수업해달라는 요구는 꾸준히 발생한다.
"선생님, 프로크리에이트라는 게 없는데요?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와요."
왜 안 나오냐면 구글플레이에 없으니깐요.
"선생님, 비슷해 보이는 그림 앱이 있어서 받아왔어요. 이걸로 수업해 주시면 안돼요?"
안됩니다. 저는 이 앱을 써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 다음 주 수업까지 해보시고 저희 애 가르쳐주세요. 요즘 디지털 드로잉이 핫하다는데, 저나 애아빠나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 어렵더라고요. 선생님 비슷하니까 좀 보시고 알려주세요."
...
수강생뿐 아니라 실제로 교육팀 팀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안드로이드 드로잉 수업 요구가 지속적으로 들어오는데, 좀 해주시면 안 되겠냐. 두 타임 운영이 어려우시면 방학 때만이라도 특강으로 해주시면 좋겠다.
일단, 이 요청사항들이 가능하려면 나한테 안드로이드 기반의 기기가 있어야 한다. 사야 한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 들인 첫 스마트폰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이폰 외의 기기를 써본 적이 없다. 유료 어플 몇 개 구매하고, 그게 몇 년 치 쌓이고, 그러다 아이패드도 사서 연동하고.. 애플 워치도 사고, 에어팟도 사고.. 애플 생태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상태다. 그냥 애플의 노예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낯선 기기 환경이 두렵다. 한 번씩 부모님 집에 들르면, 뭐 좀 봐달라 요구를 하시는데 사실은 내가 부모님 보다 더 모르기 때문에 그때마다 검색하며 찾느라 진땀을 뺀다.
그런 내가 다른 기기를 사서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조금만 더 부지런하다면,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언젠가..?라고 미루다가 결국 또 2024년도 다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