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오기 전 유럽여행을 한 탓에 수중에는 돈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2019년 연말부터 코비드가 캐나다에 퍼지기 시작했으니, 미리 다녀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했던 나는 밴쿠버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레스토랑과 카페를 돌며 'Are you currently hiring?'이라며 이력서를 돌렸다.
밴쿠버에 도착한지 2주만에 다운타운의 어느 스시집에서 서버로 일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일하다 보니 실수도 많이했고, 알아듣지 못해서 좌절할 때도 많았다. 내가 사는 밴쿠버가 있는 BC주는 2주에 한번씩 급여를 받는데, 첫 급여를 받던날 너무 행복했다. '나도 할 수 있구나, 영어도 그리 못하는 편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한국에서 익숙했던 생활의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선 첫날이었다.
그렇게 3개월을 열심히 일하던 어느날, 코비드 판데믹으로 인해 캐나다 전역의 레스토랑, 술집, 카페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모두 셧다운 되었다.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 렌트비와 생활비가 걱정되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난생 처음으로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연락해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서른이 다 되어 엄마에게 돈을 빌리다니.. 너무 창피했다.
셧다운이 끝나고 다시 출근하게 되었을 때 정말 기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주권을 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주변의 친구들 영향이 컸다. 친구 중 한명이 이미 영주권 준비 중이었고, 나도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도전해보자 라는 마음이 생겼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워홀 1년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야 했지만, 돌아가기 싫었다. 당시 일하던 스시집을 그만두고 대만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나를 잘 챙겨 주셨고, 워홀 이후 워크퍼밋 스폰서도 해주겠다고 하셨지만, 일적으로 맞지 않아 결국 그만두었다. 다시 실직자가 된 것이다.
밴쿠버에와서 만난 한국인 친구가 일하는 곳에서 마침 키친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면접을 보러 갔다. 바로 채용이 되었고, 워크퍼밋을 지원해준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 반의 키친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엄격한 주방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실수도 많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며 매니징을 맡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키친에서 일하면서 불에 데이고, 칼에 베이며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지만, 오직 영주권 하나만을 바라보며 버텼다. 가장 큰 부상은 뜨거운 기름이 내 발위로 쏟아져서 화상을 입었던 일이다. 당시 마침 새로운 보험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이라 무보험 상태였다. 다음 날 워크인 클리닉에 찾아갔지만, 의사는 감염 위험때문에 물집이 큰 화상에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진료시간은 2분정도였고 진료비로 160불 지불하고 나와야 했다.
캐나다는 근무 경력 1년이 있으면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2021년, 코로나로 국경을 너무 오래 닫아놨던 탓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영주권 점수가 낮아졌고, 많은 인원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영주권 인비테이션이 발급되었다. 나 역시 그 기회를 잡아, 캐나다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21년 12월, 나는 드디어 영주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 키친에 얽매일 이유가 없어졌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매니저에게 퇴사를 알리자 돌아온 말은 '영주권 먹튀'였다. 내 돈으로 워크퍼밋과 영주권을 준비했는데, 이런 말을 듣다니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 일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데 몸이 좋지 않았다. 겨울 감기인 줄 알았지만, 코로나 자가 테스트에서 양성이 나왔다. 매니저는 키친 멤버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모두에게 검사받으라고 알렸다. 다행히 다른 직원들은 음성이였다. 그날 저녁, 매니저가 전화를 해서 앞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예정대로라면 곧 그만둘 예정이었지만, 나는 또 그렇게 실직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