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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여사 Nov 04. 2024

갱년기 설여사 이야기

제주 올레길 다녀온 설여사

지리산 다녀와 일주일 뒤... 남편과 딸의 새벽배웅을 받으며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드디어 제주로 떠났다. 제주에 비가 온다지만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엔 맑은 날만 있는 게 아니니까 비를 맞아보기로 했다. 제주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올레 1코스로 이동후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 오는 날에 더욱 낭만적인 오름도 오르고 아스팔트길도 걷고 예쁜 종달리마을에서 인상 좋은 사장님이 만들어주신 멸칫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그때까진 좋았다. 그 후 다시 주황파랑 올레길표시 리본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잠깐 사이에 길을 잃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한 시간을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서야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비를 맞고 다시 한 시간을 돌아가서 종착지까지 또 한 시간을 걸어야 한다. 벌써 네시다.  멘붕이 와 서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택시를 불렀다. 종착지인 광치기해변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첫날부터 길을 잃은 것도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것도 속상했다. 허탈하게 해변을 감상한 후 근처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와 체크인을 했다.

1인용 숙소는 너무 아담했다. 침대하나와 화장실이 전부다. 벽은 시멘트 그대로다. 헉... 이런 숙소는 처음이다. 흡사 감옥 같다. 혼자 개고생 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숙소마저...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작아서 그런지 아늑하고 바로 창밖으로는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보인다. 그것으로 위안이 된다.

하루종일 비에 젖은 발은 팅팅 불고 물집이 잡혔다. 양말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살 것 같다.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배도 안고프다. 그래도 뭐를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서 침대에서 꾸역꾸역 요기를 했다. 김밥을 먹고 누워 잠을 청하지만 잠이 안 온다 하루종일 비 맞고 걸었는데 피곤하지도 않다. 젠장 TV도 없다.

그래도 씩씩하게 지내보자. 어떻게 온 제주도인데. 이튿아침은 날씨가 맑다. 성산항에 전화하니 배가 뜬단다. 숙소를 하루 더 연장하고 아침 일찍 올레길 1-1코스인 우도로 향했다. 우도는 아름다웠다. 해녀의 집에서 해물칼국수로 늦은  아침을 먹고 예쁜 카페에서 우도땅콩 아이스크림과 우도샌드, 커피까지 먹었다. 제주에서는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을 거다. 우도의 올레길은 구석구석 예쁘다. 예쁜 우도를 걷다 또 길을 잃었다. 이번엔 바로 리본이 보일 때까지 뒤돌아 왔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올레리본이 보였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바로 뒤돌아 가서 제길을 찾는 게 제일 빠른 길인 걸 깨달았다. 그렇게 우도올레를 걸었다. 비양도도 둘러보고 우도등대도 올라갔다. 혼자 걸으니 편하고 좋다. 그런데 행복하진 않은 것 같다. 거기다 발가락이 아프다. 또 물집이 잡힌 것 같다. 5시간을 걷고 3시쯤 숙소로 돌아오니 발가락과 발바닥에 커다랗게 물집들이 잡혀있다. 물집을 터트리고 밴드를 붙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발로는 낼 또 걷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낼은 성산일출봉을 올라갔다 와서 첫날 길을 잃은 지점까지 역으로 올레길을 걸어가서 제주여행을 마무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 내가 첫날 길을 잃은 지점에 작은 서점이 있었다. 서점 간판을 보다 그 길에 있는 올레리본을 못 보고 놓친 거다. 가는 길에 원래 내 계획에 있던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한 목화휴게소에서 오징어에 맥주도 마시고, 나를 홀린 작은 서점까지 걸어가서 첫날 못다 한 올레 1코스를 완주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티켓을 예약했다. 


집을 떠나온 이틀 동안 남편과 아이들에게 한 번도 전화가 없다. 서운함이 또 밀려온다. 서운함을 참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남편이 반갑게 전화를 받아준다. 어제부터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발이 아파서 낼 집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하니 걱정 많이 했다며 빨리 오란다. 역시 남편밖에 없다. 그새 서운함이 사그라진다. 저녁 8시다. 입맛이 없어 저녁도 안 먹고 있었는데 남편과 통화를 하고 나니 그제야 살짝 허기가 진다. 1인들이 많이 오는 숙소라서 1층에 혼술 하기 좋은 이자카야가 있단다. 마지막 제주도 밤을 즐기기 위해 이자카야로 가서 사시미에 하이볼과 생맥주까지 시켜서 생전 처음으로 바에 앉아 혼술도 해봤다. 혼술도 별거 아니네. 그렇게 설여사는 제주도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성산일출봉을 다녀와 목화휴게소에서 오징어에 맥주도 시원하게 마시고 종달리의 작은 서점까지 걸어가서 나의 맘에 와닿은 박순우 작가의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란 책을 한 권 구입하고 갑자기 떠나온 짧고 아름답고 발이 아파 힘들었던 혼자만의 2박 3일의 제주올레길 여행을 끝내고 아쉬움과 아픈 발을 겨우겨우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떠날 땐 비장한 마음으로 한 달 정도 안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꼴랑 2박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좋다. 생전 처음 혼자 도전해 본 여행이었는데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도 혼자 여행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혼자 하는 여행은 좋다. 그러나 둘 이하는 여행이 더 행복하다는 건 어쩔 수 없다. 혼자 계획을 세우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더 긴장해야 했다. 또 멋진 풍경을 보고 함께 감탄할 사람이 있었으면 더 기뻤을 것 같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혼자만의 여행에서 약간의 쓸쓸하고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발 안 아픈 신발을 신고 아름다운 제주 올레길을 둘이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설여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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