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합창단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하셨었다. 노래 실력이 괜찮았나 보다. 합창단에 들어가고 싶어서 엄마에게 얘기하니 우리 형편엔 어렵다고 안된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아쉬움이 있어선지 내가 죽기 전에 노인 합창단이라도 꼭 해보고 죽겠노라 생각하며 살았다. 40대 후반에 직장 동료와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동료는 자기가 합창동호회를 하고 있다며 생각 있으면 와 보란다. 둘째도 대학에 들어갔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 하나는 하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합창단을 가보기로 했다. 합창동호회면 가곡이나 가요를 부르며 재미있게 놀다 오는 거겠지 하며 쉽게 생각하고 합창단을 갔다. 가자마자 지휘자님께 오디션을 봤다.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파~"를 했다. 알토자리에 앉으란다. 알토는 뭐냐? 할 틈도 없이 악보를 하나 주신다. 베르디의 레퀴엠이란다. 악보를 받고 잘못 왔구나 생각하고는 오늘은 그냥 듣기나 해 보자 하고 합창단 연습을 지켜보았다. 혼성합창단의 노래는 너무 아름답고 감동이 밀려왔다. 알고 보니 40여 명의 중년의 합창단원들은 전공자가 반, 대학 때부터 합창동아리를 했던 20~30년의 경력을 지닌 엄청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지휘자님도 서울대를 졸업하고 유수한 독일학교에서 유학하고 현 모지방 시립합창단 지휘자를 역임하고 계신 분이었다. 소개해준 동료에게 내가 생각했던 합창단이 아닌 것 같다고 하자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함께 하잖다. 처음엔 포기할까 하다 그래 노래가 별거냐... 해보다 안되면 그때 그만 두면 되는 거지 하며.. 내향적이지만 무모하게 도전적인 설여사는 그렇게 합창단을 처음 시작했었다. 합창단 참여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일 년에 두 번 정기공연과 특별공연 등 거의 한 두 달에 한 번씩 큰 공연을 해나가다 보니 취미가 아닌 일이 되는 것 같았다. 재미있었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힘에 부쳤는데 마침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를 핑계로 2년 넘게 활동하던 합창단을 그만두었다. 처음부터 너무 수준 높은 곳에 발을 들여놨던 것이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부족한 실력과 너무 많은 공연 스케줄은 나에겐 버거웠다. 그래도 합창단에 대한 미련은 남았다. 나에게 맞는 가벼운 가곡이나 가요를 부르는 합창단이 있으면 다음에 또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그때 같이 합창단을 하던 언니가 있다. 내가 합창단을 그만둘 때 그 언니도 그쯤 합창단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와 언니는 그 동네를 떠나 공교롭게 같은 동네로 이사했다. 얼마 전 동네 소식통인 언니가 이 근처 아파트에 합창단이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한다. 나는 지난번처럼 수준 높은 곳은 안 가겠다고 하니 이번 합창단은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가곡이나 가요를 주로 부르는 합창단이란다. 지난번이랑은 분위기가 다르다며 같이 가보자고 한다. 갱년기로 우울하던 설여사는 노래를 부르며 바닥으로 꺼져가는 내 마음을 업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합창단을 가게 되었다. 남편이 쉬운 산도 산은 산이라고 늘 말했는데 첫날 합창단을 다녀와 그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쉬운 합창단도 합창단은 합창단이다. 나는 알토자리에 스스로 앉았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광화문연가' 악보를 보고 알토음을 찾아 헤매다 안드로메다를 왔다 갔다 했다. 에이~왜 또 합창은 한다고 해서 이 지랄이냐... 노래 부르는데 뭐가 이리 힘드냐... 그냥 속시원히 빽빽 부르고 싶은데.. 알토는 뭐냐고... 허긴 소프라노처럼 음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에고... 더 나이 먹고 노래교실이나 다닐걸... 합창단이 웬 말이냐!
같이 간 언니에게 언니는 음을 보면 음이 소리로 나오냐고 하니 절대 아니란다. 본인도 연습하고 익혀야 부를 수 있단다. 그 말에 힘이 난다. 그래... 내가 음악천재도 전공한 사람도 아닌데 어찌 악보만 보고 노래를 부를 수 있길 바라는가. 앞으로 열심히 연습해서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합창단에 잘 적응해서 오래오래 다녀보기로 했다.
무모한 설여사는 그렇게 두 번째 합창단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