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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균 Nov 01. 2024

11월의 서정, 빗방울로 피어나는 시(詩)

차분한 서막, 11월의 시작


창가에 내려앉은 11월의 첫 빗방울은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가며 고요한 회색빛으로 세상을 감싸고, 나뭇가지 끝에 맺힌 물방울은 천천히 떨어져 대지에 스며들어 마치 시간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흘러가는 듯하다. 여름의 격정 어린 빗소리와는 달리, 이 빗소리는 가을의 마지막 숨결을 속삭이며 부드럽게 사라진다. 한때 붉고 황금빛으로 타오르던 단풍도 이제 서서히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며, 마치 생의 마지막 무대를 마무리하는 배우처럼 서서히 그 자취를 남긴 채 떠나간다.



빛바랜 흔적, 11월에 스며들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스치며 남기는 옅은 색조는 지난 계절의 추억을 덧칠하듯 잎사귀에 생기를 머금던 푸르름은 가을빛에 물들어가며 점차 빛을 잃고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다. 물기를 머금고 떨어지는 잎사귀는 오랜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대지에 고요히 내려앉고, 자연은 이렇게 그 흔적을 천천히 흩어내며 또 다른 무대를 준비하는 듯하다.



고요 속의 사색, 빗소리가 들려주는 시간


빗소리는 한결같은 리듬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된 감정을 조용히 두드리며 분주한 일상 속에서 놓쳐왔던 순간들을 서서히 불러내는데, 마치 우리가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손짓하는 듯한 이 빗소리는 어린 시절 창밖 빗소리에 잠기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운 고요 속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나를 다시 마주하며, 내면의 깊은 울림이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바랜 단풍의 여운, 흙으로 스며들다


붉고 노랗게 빛나던 단풍이 빛을 잃고 서서히 대지로 돌아가는 장면은 우리의 오래된 기억들이 흙 속에 스며드는 모습처럼 흘러가고 있다. 빗방울이 잎사귀에 닿을 때마다 잠시 흔들리다 마침내 대지에 자리 잡으며, 우리의 소중한 기억이 서서히 시간 속에 녹아가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빗방울 속 삶의 은은한 속삭임


빗소리는 침묵의 장막을 걷어내며 우리에게 고요한 시간을 선물하고, 떨어지는 물방울마다 오래된 감정이 잔잔히 깨어나며 마음에 스며들어 우리는 놓쳤던 감정들과 미처 다하지 못한 생각들을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고요한 속삭임 속에서 빗소리는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라는 뜻을 전해주는 듯,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기억 속 빗소리, 어린 시절의 고요함 속으로


어린 시절의 빗소리는 나만의 우주로 이끄는 고요한 안내자였다.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 속에 잠겨 있던 그 시간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지금도 빗소리가 들리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고요가 천천히 살아나며, 잊고 있던 감정들이 조용히 깨어나 삶의 흐름 속에서 묻혀 있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자연의 속삭임, 평온함이 머무는 시간


빗방울이 땅에 닿을 때마다 소중한 기억들이 두드려지며 되살아나고, 바쁜 일상 속에서 놓쳐왔던 소소한 행복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추억들이 빗소리와 함께 고요히 피어오른다. 빗소리는 우리에게 이런 작은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우며 평온한 시간을 선사하며, 빗소리 속에서 우리는 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소중한 기억들을 가슴에 안는다.



끝맺음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열어주는 11월


11월의 빗방울은 가을의 끝자락을 알리며 겨울의 문을 살며시 두드리듯, 자연은 모든 것이 한 번의 끝을 맞이하는 듯하지만 빗방울은 새롭게 다가올 계절을 위한 여백을 남긴다. 우리 삶도 자연의 순환 속에서 흐르며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옅어져도 빗방울 속에 스며든 우리의 자취는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빗소리 속에서 마주하는 삶의 깊이


빗소리 속에서 나는 잠시 머물다 사라져 가는 단풍을 닮은 작은 존재임을 깨닫고, 그 소중한 기억과 삶의 의미가 결코 강렬하지 않아도 가슴속에 잔잔한 빛으로 남아 있음을 느낀다. 계절이 바뀌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의 기억은 빗방울처럼 가슴 깊이 남아 삶의 깊이를 밝혀주며, 빗방울은 희로애락을 머금고 흙 속에 스며들어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한다.



순환 속에서 찾아오는 11월의 깨달음


11월의 첫 비는 가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동시에 담아내며 비가 멈추면 또 다른 계절이 펼쳐지듯, 자연의 순환 속에 우리의 삶도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빗소리와 함께 다가올 계절을 맞으며 마음을 비우고 내면을 정돈하는 시간 속에 11월의 서정 속 빗방울이 남긴 하루는 우리의 여정에 작고 은은한 쉼표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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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서정과 빗방울을 주제로 한 시와 어울리는 한시로, 송나라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한우(寒雨)'를 소개합니다.



寒雨(한우) - 范成大(범성대)


何事冬來雨打窗(하사동래우타창)

夜聲滴滴曉聲淙(야성적적효성종)

若爲化作漫天雪(약위화작만천설)

徑上孤篷釣晚江(경상고봉조만강)


어찌하여 겨울이 오는데 비가 창을 두드리는가

밤에는 똑똑 떨어지는 소리, 새벽에는 졸졸 흐르는 소리

만약 이 비가 온 하늘에 내리는 눈으로 변한다면

길 위의 외로운 배에서 저녁 강에 낚시를 드리우리


이 시는 겨울비가 내리는 풍경을 묘사하며, 비가 눈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11월의 서정과 빗방울의 정취를 느끼기에 적합한 작품입니다.


참고 - 범성대(范成大)는 송나라 시대의 시인이자 문인입니다. 그는 자연과 농촌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며, 특히 산수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한시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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