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리듬을 다시 맞추며
타인의 시간 속에서 마주한 벌거벗은 나
삶의 외피가 벗겨진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 정직한 자신과 대면하게 됩니다.
손에 쥔 번호표는 얇았지만 좀체 눅지지 않았습니다. 손끝에 밴 식은땀 때문인지, 손바닥 안에서 자리를 고집하는 숫자 탓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대학병원 대기실은 표정을 지운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채도를 낮춘 벽과 의자, 그리고 앞날을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곳에 고여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소리 없이 시간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전광판에서 이름 하나가 지워질 때마다 누군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진료실로 향했고, 남겨진 이들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삼십 분이라는 시간은 평소라면 금세 지나갔을 텐데, 그곳에서는 유독 질기게 늘어졌습니다.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지만, 세상의 분주한 속도는 이 대기실의 공기와 섞이지 못했습니다. 전원을 끄자 검은 액정 위로 낯선 얼굴이 비쳤습니다. 피로와 마감의 흔적, 설명하기 힘든 근심이 겹겹이 쌓인 얼굴이었습니다. 직함도 이름도 벗겨진 자리에는, 그저 불안한 중년의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꾸밀 수 없었습니다. 속도를 자랑할 수도, 성취를 증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기다림과 몸, 그리고 애써 외면해 왔던 마음뿐이었습니다.
몸은 고장 난 기계가 아닌 유일한 집
몸은 고장이 나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래 무시당해서 아파집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몸을 뒤로 미뤄두고 살아왔습니다. 일이 막히는 날에는 오히려 몸을 더 몰아세웠고, 통증은 나중에 처리할 소음쯤으로 여겼습니다. 피로를 의지로 덮으며 보낸 시간 동안, 몸은 별다른 항의 없이 묵묵히 버텨주었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던 순간이었습니다. 발바닥에 닿는 보도블록의 요철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걷는다는 행위가 이렇게 많은 관절과 근육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제 몸은 닦고 조이면 끝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육체는 제가 이 삶에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집이었습니다. 몸은 고장이 나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무시당해서 비명을 지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발바닥에 지그시 힘을 주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저를 지탱해 온 존재에게 건네는, 늦었지만 진심 어린 화해의 악수였습니다.
초겨울 은행나무 아래에서 배우는 순서
삶은 속도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병원 앞 인도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습니다. 잎을 대부분 떨군 은행나무들이 길을 따라 서 있었습니다. 앙상해진 가지 끝에 몇 장 남지 않은 노란 잎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바람이 스치면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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