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

by 정성균

경계 밖으로 밀려난 아침의 정지


눈을 떴을 때, 어디로도 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먼저 깨어 있었습니다. 의식은 깨어난 순간부터 이미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느라 한창 바빴을 시간임에도 갈 곳이 사라졌음을 인식하자 실내의 기압마저 낮아진 듯했습니다. 익숙했던 견고한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선 첫날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존재를 지탱해 주던 튼튼한 경계가 사라지자, 세상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무거웠습니다. 업무 지시나 급박한 메시지도 더는 오지 않았습니다.


설명해 주던 배경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 수식어도 없는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평생 자신의 것이라 믿어왔던 성취들이 사실은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부정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만들어둔 설계도에 맞춰 잠시 세워둔 가설물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풍경을 마주하니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힘든 서늘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설계 엔지니어로 살며 오차 없는 도면을 그리는 일에는 익숙했으나, 삶의 지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능을 수행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발끝에 걸렸습니다.


바닥에서 시작한 정밀 진단


모든 것이 멈춘 자리에서 자신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거실 바닥에 앉아 삶을 이루던 조각들을 다 펼쳐놓았습니다. 설계실에서 복잡한 기계의 도면을 검토하며 오류를 찾아내듯, 지난 이력과 생각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따져 보았습니다. 버려야 할 고정관념과 끝까지 가져가야 할 진짜 실력을 골라냈습니다. 바닥은 차가웠고,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제대로 붙잡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떨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손은 오히려 불안정했습니다.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정신을 번뜩 들게 했습니다.


돋보이고 싶어 덧입혔던 화려한 치장들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벗겨져 나갔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 했던 분칠이 지워지자, 비로소 진짜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수치스럽고 무력한 마음도 들었으나, 덕분에 스스로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부서진 마음의 잔해들을 치우는 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떨림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새로운 주춧돌을 놓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진동이었습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만 땅의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떨림을 외면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바닥을 딛는 감각이 선명해질수록 두려움은 힘을 잃어갔습니다.


영점(Zero Point)의 지독한 선명함


어려운 시기가 주는 정직한 교훈은 지금 서 있는 바닥을 증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바닥은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느끼는 물리적 현실입니다. 더 내려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의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습니다. 흙탕물이 가라앉아야 비로소 바닥에 떨어진 진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거실 구석을 멍하니 바라보며 소리 없는 압력을 견뎠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했습니다.


삶의 '영점'이 보였습니다. 복잡한 마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겨우 드러난 지점이었습니다. 영점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방향도, 기준도 소멸한 상태였습니다. 어떤 소음도 틈입하지 못하는 완전한 진공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습니다. 자리에 남아 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뿐이었습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삶을 측정하던 습관을 거기서 멈췄습니다.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게 없는 진짜 0의 지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자유롭기도 했지만 참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영점의 감각은 지독하게 선명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0에서 1을 만들어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과도 같았습니다. 빈 공간이야말로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청소년들과 나누었던 과거의 비전


지나온 길 위에는 참 여러 정거장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미래의 비전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상담하는 일에 긴 시간을 쏟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되돌아오는 기분이 듭니다. "가진 조건이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던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며, 인생 설계도를 함께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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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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