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일 아침에 명상처럼 적는 나의 일기는 장지갑 크기의 회사 수첩에 적는데, 수첩의 오랜 짝꿍은 영문으로 이름 새겨진 LAMY 만년필이다.
어린 시절 멋진 어른들이 쓰던 만년필의 대부분은 '진공필러 방식*'으로, 충전을 위해서 잉크병의 잉크를 주입하여 사용하는데, 아주 작은 실수에도 주변은 잉크로 엉망이 될 수 있었다. 나는 호기심 많은 스스로를 이런 사소한(?) 사고로부터 자유롭게 두질 않아서, 벌어진 그 상황의 변론을 위해 머리 굴렸던 날들이 많았다.
요즘은 '카트리지 방식'의 1회용 교환 형태를 사용하기에 그런 문제는 아주 많이 줄었고, 나이 들어서 더 이상 나를 자극할 호기심도 없기에 예전의 그런 행복한 기억(?)들을 만들지 않는다.
2023.10.20.(금) 교환했던 검정잉크 카트리지는 더 이상은 자신을 찾지 말라며 사관*의 생을 마감했다. 다음의 사관으로 파란색 카트리지를 선택하였고, 만년필의 펜촉(Nib)과 피드(Feed)에 남아있는 검정잉크 제거를 위해서 펜촉부위를 미온수에 한참 담가두었다가, 헹굼을 하였다.
신규 파란색 카트리지를 섹션(Section)에 '딱!'소리가 날 때까지 꽂아 넣고, 일정 시간을 펜촉까지 잉크가 잘 내려왔는지 확인을 빈 종이에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연속으로 그리면서 옅은 색이 온전한 파란색 잉크가 나오도록 한다.
이번 헹굼에서 미온수를 피드내부에서 충분히 제거하지 않았던 것인지, 동그라미 ~ 세모 ~ 네모를 번갈아 가며 한참을 그려도 연한 푸른색이 좀처럼 온전한 파란색으로 변화를 하지 않았다.
신경이 살짝 쓰이려는 순간과 동시에 눈과 손이 멈추면서, 'A에서 B로 가는 과정은 지극히 아날로그(Analog) 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A와 B사이에는 여러 단계에서 작은 변화로 조금씩 조금씩 옆칸의 자리로 이동하여 결국 변화가 어느 선을 넘으면 우린 그것을 변했다고 인지하고 표현한다.
내 마음속의 변화는 'A'에서 바로 옆칸으로 옮기는 순간부터인데, 사람들이 변화한 나를 알 수 있을 때는 'B'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다.
드디어 'A'와 'B'사이의 그 우주 같은 간격은 오로지 나만이 아는 비밀의 시공간이 된다.
The universe inside me!
[용어설명]
*진공필러(vacuum filler) 방식: 펜촉을 잉크에 푹 담금 뒤 노브를 눌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잉크가 배럴에 차오르게 하는 방식.
*사관: 고려, 조선 시대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직책
*만년필 내부 구조는 펜촉(Nib)-피드(Feed)-섹션(Section)-카트리지(Cartridge)로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