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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가족입니까

2nd-A NORMAL FAMILY

by 조은영 GoodSpirit
<보통의 가족>의 원작, <더 디너>

이 작품은 네덜란드 소설가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소설 <더 디너>는 2013년 네덜란드, 2014년 이탈리아, 2017년 미국에서 동명 제목으로 3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보통의 가족>은 원작 <더 디너>의 4번째 리메이크작이다.


보통의 가족이란 무엇인가? '보통'은 일반성, 평범성, 혹은 정상을 의미한다. 형 재완과 동생 재규가 이룬 두 가족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가족의 보통성은 무엇일까?


형 재완은(설경구) 사냥을 즐기는 변호사이다. 그는 보복운전으로 살인을 저지른 재벌기업의 아들을 과실치사로 풀려나게 돕는다. 그가 특별히 악인이어서가 아니다. 변호사로서 그에게 '선과 악'의 잣대는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오직 '법률지식'을 바탕으로 의뢰인의 죄가 성립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그의 일일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유능감을 재차 확인하고 가족을 지킨다. 그에게 '선'은 능력과 실력인 것이다.

동생 재규는(장동건) 환자를 살리는 일에 진심인 소아과 의사다. 그는 형의 의뢰인이 차로 들이받아 사망케 한 가장과 함께 있던 딸이 응급실에 실려오자 기적처럼 살려낸다. 그의 아내 연경(김희애)은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구호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성공한 프리랜서 번역가이다. 대외적으로 그들 부부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성실함과 헌신을 삶의 근간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형과 재혼한 젊은 형수를 조롱하는 농담을 서슴지 않고 조카의 대입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우수자원봉사상을 거짓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특별히 악인이어서가 아니다. 나의 능력을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으니 그 정도 부도덕함은 너무 사소해서 남에게 해 될 게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은 Give and Take다.


가족의 전시

형의 딸과 동생의 아들이 묻지마폭행으로 노숙자를 폭행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혀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동생의 아내였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아들의 진회색 후드티에 묻은 피를 세탁하고 어두운 아들 방으로 들어가 말한다.



"내가 뭘 봤거든."

"뭘?"

"남자애랑 여자애가 노숙자를 때리는 거."

"나 아냐."


아들의 아니라는 말에 엄마는 오열하며 아들을 끌어안는다. 그녀에게 두려운 건 아들이 노숙자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아들은 살인자가 되고 자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닌 살인자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니까.


큰 딸이 노숙자 폭행사건의 가해자임을 알게 된 형은 CCTV 영상에 노출된 딸의 옷을 태운다. 노숙자가 입원한 병원에 은밀히 찾아가 그가 혼수상태임을 확인하고 동생에게 연락을 취한다.


평소와 달리 외딴 시골 식당의 야외 평상에 형과 마주 앉은 동생은 의아해한다. 형이 내민 폭행영상을 확인한 동생은 분노하며 집으로 질주하다가, 그만, 고라니 한 마리를 치고 죽은 고라니를 길가 숲으로 치운다. 도로 위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하나의 암시다. 이제 동생은 더 이상 살리는 자가 아니고 죽이는 자가 될 것이라는.


처음에 동생은 아들을 자수시킬 생각이었다. 아들을 우격다짐으로 다그쳐 경찰서로 끌고 가 자수시키겠다던 동생은 취객을 연행하는 경찰을 차 안에서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언제나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이 중요했던 그는 살인자의 아버지로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그가 쌓아 올린 사회적 평판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폭 피해자였던 아들이 울면서 말한다. 잘못한 거 안다고. 노숙자가 죽을 줄 몰랐다고. 자신은 그것보다 더 아프게 맞았어도 괜찮아서 괜찮을 줄 알았다고. 그러자 동생은 함께 울며 아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좋은 일 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받으며 안도한다. 그동안 신앙인으로서 사회에 많은 선한 일들을 하였고 앞으로 아들을 갱생시킬 것이니(give) 아들의 비행 한 번쯤은 봐주실 것이라는(take) 셈법이다.


여기서 참회와 용서의 괴리가 발생한다. 영화 <밀양>에서도 같은 사례가 있었다. 신애(전도연)는 아들을 잃은 고통을 신앙을 가지고 전투적으로 이겨나간다. 그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들을 유괴살인한 범인을 용서하고 신앙을 설파해서 그 역시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큰 마음을 먹고 신애가 교도소에 면회 갔을 때 그는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충격에 무너져 내린다. 가해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함이 없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노숙자를 죽인 아들의 죄를 그 아버지가 용서한다는 말인가?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사회에 좋은 일 하며 살면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보상이 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착각. 하나님께 고백하고 참회하면 용서받았다는 착각은 <밀양>에서 유괴살해범이 저지른 오류와 동일하다.



결국 노숙자는 죽고 장례식장에 조문을 간 형은 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외국의 명문대학에 합격한 딸은 기쁨에 들떠서 합격선물로 약속한 고급 외제차를 사달라고 한다. 형은 당혹스러움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다.


'이 아이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이 없어도 괜찮은 것인가?'


형은 죽은 노숙자의 어머니의 텅 빈 눈을 마주한다. 그날 밤, 비가 몹시 내리는 날, 형은 그녀의 궁핍한 단칸방의 좁은 방충망 틈으로 돈봉투를 비집어 넣는다. 딸의 죗값을 대신 갚아보려는 듯이.

형은 노숙자의 가난한 어머니에게 얼마간의 돈으로, 동생은 예배당에서 흘린 참회의 눈물로, 노숙자의 죽음과 함께 자식들의 죄를 더는 묻지 않기로 한다.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아이들이 이 일을 계기로 뭔가를 깨닫고 좀 더 잘 살아주리라는 헛된 믿음과 함께.


일을 마무리 짓는 부부동반 식사모임을 위해 채비를 마친 형은 내키지 않아 하는 아내, 지수(수현)에게 다가간다. 전처와 사별한 후, 재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아내. 그녀와 재완 사이에는 젖먹이 아기가 있다. 그녀도 어엿한 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그래도 가족이니까 함께.'라는 남편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아내가 채비를 위해 방을 나선다.


그때 아내의 휴대폰에 알림음과 함께 [소리가 감지되었습니다]라는 문자가 뜬다. 남편의 딸과 함께 있는 아기의 안전이 불안했던 아내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알림음과 영상 전송을 설정해 놓은 것이다.


문자를 터치하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딸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들린다.


"근데 있잖아.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몇 살인지 알아?"


이내 고요해지는 배경음. 천천히 숙여지는 형의 고개.



부부동반 식사자리에서 형은 말한다.


"아는 검사와 통화했어. 애들 문제. 재판받게 할 거야."


동생은 분노한다. 왜 이제 와서 그러냐고. 형이 아내의 휴대폰에 전송된 영상을 보여준다.


"근데 있잖아.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몇 살인지 알아? 80대야. 근데 노숙자는 얼마인지 알아? 40대에 다 죽는대."


두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는다.


"그럼 우리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그 노숙자는 죽었을 거네. 이번 겨울에 얼어 죽을 수도 있었겠지."


형이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말하자, 동생은 형의 멱살을 잡고 말한다.

"애들 건드리면 죽여버릴 거야."


형은 언제나 그랬듯이 끝내 자기 뜻대로 할 것임을 아는 동생은 짧은 순간 결단을 내린다. 내 아들을 지키려면 형을 죽여야 한다고.


그리고 식당 앞에 서있는 형을 차로 들이받는다. 길바닥에 쓰러진 형을 보고도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고라니를 치었을 때보다 침착하다.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6번의 죽음은 모두 타살이다.


사냥당한 숲 속의 멧돼지

보복운전, 도로 위 남성

짓뭉개진 창가의 무당벌레

로드킬, 도로 위 고라니

묻지마폭행, 길 위의 노숙인

친족살해, 길 위의 형


이 죽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르고 동기도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죽음들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강자와 약자라는 패러다임이 존재하고 같은 마음에서 자행된 죽임이기 때문이다. 6번째를 제외하고는 죽이는 자는 강자로 죽음을 당하는 자를 열등한 약자로 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4번째는 고의성이 없는 사고이긴 하지만 고라니를 친 동생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같은 죽음으로 생각한다. 일종의 약육강식으로 나보다 약한 존재를, 그것이 곤충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도태시켜 강자가 살아남는 것은 이 사회의 지배원리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6번째는 조금 다르다. 동생에게 성공한 변호사로 부를 거머쥔 형은 강자이다. 동생은 집안의 대소사에 언제나 형이 결정권을 갖는 것에 대한 열등감과 모멸감을 느낀다. 그 역시 사회적으로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충분히 유능하지만 형과 비교한 자신은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 약자일 뿐이다.


그래서 형의 제안에 대해서는 늘 대립각을 세운다. 형이 아이들의 범행에 대해 덮자고 했을 때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했던 동생이다. 그러나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형이 아이들이 죗값을 치르도록 재판받게 하겠다고 했을 때 동생은 분노했다.


왜 그랬을까? 형이 하는 말에는 무조건 삐딱선을 타고 싶어서? 그보다는 언제나 형이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형은 협의하지 않는다. 식사모임은 서로의 의견을 묻고 논의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형이 정한 것의 동의를 구하는 자리다. 아이들을 제외한 부부동반 식사자리에서 동생은 말한다. 형은 꼭 비싼 밥을 사주면서 불편한 소리를 한다고. 그렇다. 식구라는 유대를 강화하는 한솥밥 먹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불편한 소리를 들으며 비싼 밥을 얻어먹는 구차한 자리인 것이다.


힘의 논리는 비단 형제지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생의 아내는 형의 아내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교육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그녀를 무시한다. 형님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우월감 이면에는 젊고 아름다운 형님에 대한 열등감이 공존한다.


아이들은 가족의 일이 논의되는 자리에서 항상 빠져있다. 심지어 아이들이 저지른 중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조차도 아이들은 부재한다. 그런 아이들이 책임감을 배울 수 있을까? 아이들은 자신들이 범한 중대한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오로지 아이들이 촬영된 CCTV를 통해서만 진실을 목격한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폭행영상을 확인하는 가족
노숙자의 죽음에 대한 아이들의 진심이 담긴 영상을 확인하는 가족


우리들의 가족은 어떤가? 가족들의 의견은 모두 동일하고 가치가 있는가?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일에 가족구성원 모두가 아니라 아빠나 엄마, 또는 맏이만이 결정권을 갖는다면 그 가족에게는 균열이 생길 것이다. 가족 안에서 불의한 힘의 지배가 생길 것이며 존중은 사라진다.


존중이 없는 관계는 유리조각처럼 쉽게 부서져버린다. 그것이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낳은 두 아들이 있다. 가인과 아벨. 가인이 시기심으로 아벨을 죽이자 하나님이 묻는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19장 4절

그렇다. 가족은 서로 지키는 자여야 하거늘 그것을 망각하고 죽이는 자가 된 것이다. 가족 간에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는 시기와 질투로 인한 열등감과 우월감이 새겨진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뿌리이며 뗄 수 없는 것으로 가족 내에서 더욱 치열하게 서열을 정한다. 그 서열화는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퍼져나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안위란 무엇일까?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안위를 부수고서 어떻게 내 가족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걸까? <보통의 가족>에서처럼 어떤 이들은 자식을 살리고 있다고 믿거나 치열하게 살리려 애쓰지만 결국엔 죽이는 것임을 모른다.


보통의 기족의 엄마인 나는 내 자식을 살리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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