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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치 Nov 06. 2024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비평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트러스 향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이선민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 넘어진다. 넘어질 때마다 흰 셔츠가 버찌 즙으로 가득 물든다. 넘어지는 매일 오후 다섯 시에 반복되는 듯 보인다. 통상적으로 비춰지는 오후 다섯 시는 어떤 시간인가? 대부분의 식당들의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는 시간이다. 낮이 저물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이며, 하늘이 점점 일몰로 물드는 시간이다. 이처럼 오후 다섯 시는 무언가가 끝남으로써 무언가가 시작되는 초석이 되는 시간이다. 진은영의 세계에서 끝나며 시작되는 것은 무엇일까?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매일」 전문


흰 셔츠―오후 다섯시의 공중과 버찌―토마토의 유사성은 “개별자를 동일자에 종속시키는 매개 역할을 한다.” 넘어짐과 낙화라는 행위 이후 발생하는 흔적들을 이미지로 만들어 시각화한다. 시각화된 이미지는 청년 세대를 대변한다. 흰 셔츠를 입고도 매일 넘어져 검붉은 색으로 셔츠가 더러워지고, 공중으로 상승해야 하는데 자구만 낙하하며 흘러내린다. 이러한 시도로 시의 바깥에서 개별자로 존재하던 독자들을 시인이 거주하는 세계 속의 ‘우리’로 편입시킨다. ‘우리’로 편입된 독자들은 진은영의 뻔뻔한 태도에 감화되어 그의 이미지를 단번에 수긍한다. 진은영은 하늘이 토마토 색 일몰로 물드는 순간에 말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고. 그러면서 “어둠을 흔”든다. 그 까닭은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어둠을 흔들면서까지 말하고 싶었던 발화 대상인 ‘틀린 것’은 무엇일까?


흑단 상자 속에는 어둠이 있다. 그리고 그 흑단 상자를 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 어둠의 존재를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우리’라는 명사가 청년 세대를 대변할 때, 어둠은 곧 사회가 만든 것이 된다.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해당 연에서 마주치지 못한 사회의 이면을 이리저리 흔들며, 그것의 존재 유무를 감각으로 캐치하는 청년 세대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이때의 ‘틀린 것’은 불안이다. 현대 사회에서 청년 세대의 불안은 없는 것, 혹은 틀린 것으로 치부되고는 한다. 이미 자리를 잡은 기성 세대의 경험으로 청년 세대가 겪는 혼돈은 납작해진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시인의 세계, 청년 세대의 세계는 시큼해진다.


그러나 오렌지의 속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시큼한 오렌지가 정말 시기만 했던가? 어느 순간 달달한 부분이 불쑥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버찌도 마냥 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완전히 검게 익었을 때쯤 신맛이 사라지고 시큼하면서도 달달해진다. 진은영의 세계는 조금 시고 단 세계. 그 속에서 시트러스 향이 날 것만 같은 “파이프를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넘어지고, 언젠가 단맛이 올 것이라 믿으며 서로를 위로한다.


바다는 에메랄드빛 커다란 눈물방울이었다가 모래 한 알 속에 전부 스며들었다. 나는 흰 양파를 썰며 웃었다. 불꽃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너는 마멀레이드를 씹었다. 차가운 야구공이 운동장을 굴러다녔다. 수평선의 새들은 소리 지르며 파란색으로 추락했다.


흰 고래에게 한쪽 귀를 선물했다.

너는 오늘도 마셔야 했다. 하늘의 물렁한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진흙 구름에 반쯤 묻힌 소라고둥,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야 했다.


오렌지 만(灣) 위로 달콤한 태양이 떠올랐다. 해안선의 긴 혀를 따라 지붕의 자줏빛 이파리가 무성해졌다. 마음은 빗자루에 엉겨붙은 먼지덩어리였다. 호두나무를 닮은 여자인지도 몰랐다. 팔을 펼쳤다. 커다란 호두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놀이터의 끊어진 그넷줄처럼 흔들렸다. 모든 게 빛나는 한 쌍이던 시대는 가버렸어 너는 외쳤다. 쇳소리 나는 오후 내내, 사라진 오후를 찾아다녔다. 햇빛은 9회말 마지막 공격의 야구장이었다. 어디에나 가득했다. 나는 만루의 투수처럼, 외롭지 않았다. 호두까기 병정의 부서진 턱뼈가 상점 진열장 밑 마른 바닥에 바스락거렸다.

―「어느 날」 전문


이어 반복되는 매일 속, 진은영의 어느 날을 톺아보자. 해당 시는 마치 변명처럼 느껴져 더욱 위로로 다가온다. 매일 넘어지며 셔츠를 검붉은 색으로 물들이던 시인과 화자에게도 아름다운 날들이 있다는 듯한 변명 말이다. 그만큼 ‘어느 날’을 대변하는 시어들이 찬란하고 눈부시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와 ‘어느 날’에 겪은 일들은 상반되어 시에 보여진다.


시에서 화자와 ‘너’는 ‘우리’로 묶이지 않는다. 둘은 개별의 객체로 존재하며 화자가 ‘너’를 바라보고 있는 구조다. “흰 양파를 썰며 웃”는 화자와 “불꽃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너’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바다가 “모래 한 알 속에 전부 스며들었다”는 행과 “너는 오늘도 마셔야 했다. 하늘의 물렁한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이라는 행을 함께 보았을 때 ‘너’는 모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날’의 화자는 “진흙 구름에 반쯤 묻힌 소라고둥, 잃어버린 귀걸이”, 사라진 오후를 찾으러 다닌다. 화자의 “마음은 빗자루에 엉겨붙은 먼지덩어리”이며 화자가 사는 세계는 “모든 게 빛나는 한 쌍이던 시대는 가버”린 이후다. 그런데도 이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화자와 ‘너’가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현실에서 통용되는 아름다움과 외로움이 반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너’가 모래라고 상정하였을 때, 바다보다 커다란 눈물 방울인 것이 ‘너’에게 스며들어 ‘너’는 결국 진흙이 되었다. “하늘의 물렁한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말이다. 소라고둥과 귀걸이는 ‘너’가 진흙이 되기 전의 산물이므로 화자는 그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만루의 투수처럼,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사라진 오후는 매일에 속하여 ‘우리’가 자꾸만 넘어지는 시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빛나는 한 쌍이던 시대는 가버렸지만 햇빛이 “어디에나 가득”한 날이다. ‘우리’로 묶여 있던 화자와 ‘너’는 구분지어지고, 화자와 분리된 ‘너’는 사계를 짓뭉개어 만든 마멀레이드를 씹으며 새큼한 맛을 느낀다. “9회말 마지막 공격의 야구장”에 “어디에나 가득”한 햇빛을 쬐며 ‘우리’ 팀의 점수가 나기를 기다린다. 끝이 보이지 않던 고통과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행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를 분리시켜 만들어진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시도 속에서 독자는 어떠한 따스함과 위로를 느낀다.


독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진은영에게도 ‘아픈 날’이 존재한다.


말라가는 건초향기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오후야

너를 기다리며 이파리 사이에 달린

검은 버찌알들 전부 빛나게 닦아놓았어 방문 앞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별을

문을 활짝 열지는 마, 약봉지들이 멀리 날아가네

먹지 않고 숨겨둔 알약들은

길 잃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본 길로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오누이들에게


 그럼 자작나무숲과 새들에게, 너에게만


내 몸엔 점이 여섯 개야 나는 오늘 과일칼을 깎았어

고통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자는 살인에는 관심이 없대

아무래도 미치광이 같아, 아름답게 찌드는 일에

중독된

그리고 나는

검정 속의

오렌지 같아 아무래도 점점 흐릿해지는


이 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페스트는 익은 사과냄새 홍역은

막 뽑은 깃털 냄새가 난다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문득 깨어나고 싶다면?

 검지 손가락 위의 꿀 세 방울과 성난 말벌의 벌통 사이에서

 화려한 접시 장식보다는 푸른 아스파라거스 밭의 초조함 사이에서


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니? 어떤 詩를?


내 몸엔 점이 여섯 개뿐이야

달아난 한 개를 찾으러 밤의 손가락이 무한히 길어지고 있어

잘려나간 밑둥들이 송진냄새 뿜어내는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너를 기다릴게

―「혼자 아픈 날」 전문


해당 시 안에서 화자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몸에 점이 여섯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3연에서의 점에 대한 태도와 마지막 연에서의 점에 대한 태도는 다르게 읽힌다. 3연의 태도는 담담하며 점이 여섯 개 있는 것이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의 태도는 점이 여섯 개뿐이라며 그것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뿐’이라는 조사를 하나 추가하여 화자의 진실된 마음을 보여 준다.


화자의 몸에 있던 점은 총 일곱 개로, 하나는 달아난 상태다. 화자는 점을 찾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손가락을 무한히 늘어뜨려 달아난 하나의 점을 쫓는다. 이때의 “달아난 한 개”를 ‘너’로 상정해 보았을 때, 화자는 손가락을 늘어뜨리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흰 셔츠에 넣어 두었던 버찌는 ‘너’를 기다리며 빛나도록 닦아 놓은 것이다. ‘너’가 우리로 묶이며 매일 넘어지는 탓에 짓뭉개지지만 어쨌든 그것은 ‘너’를 위한 일이다. 또한 화자는 묻는다. “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냐고. 그리고 그 병은 마치 “어떤 詩”와 같다. 앓다―읽다는 비슷한 발음으로 느껴져서, 어떤 시를 읽고 싶냐는 물음처럼 들린다.


진은영의 매일에는 매번 오렌지가 등장한다. 시큼한 사계절을 대변하던 오렌지는 시인이 혼자 아픈 날에는 “점점 흐릿해지는” “검정 속의 오렌지”가 된다. 오렌지를 화자 그 자체로 보았을 때, 아픈 날에는 검정 속으로 침잠하는 듯 보인다.


또한 ‘고통’이라는 시어에 대한 사유가 돋보인다. ‘고통’은 “살인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왜 고통받아 죽는 사람은 이리도 많은 걸까? 화자는 ‘고통’을 “아름답게 찌드는 일”이라 명명한다. 진은영의 매일이야말로 “아름답게 찌드는 일”에 몰두하고 골몰하는 ‘우리’에 편입된 이들에게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 주는 날들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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