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1981년, 공사장에서 일하다 만난 한 씨 아저씨는 어수룩해 보이지만 눈매가 선하고 말수가 적은 조용한 분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이면 누구나 다 하는 술과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방학과 함께 시작한 공사판 노동일은 방학 끝나는 날까지 이어졌다. 그중 열흘간은 장소만 달랐지 몸 쓰는 농촌활동을 하였으니 여름방학 내내 꼬박 노동과 어깨동무한 셈이다.
몇 년 전 고3때 아버님 사업이 부도나고 집안이 기울어 대학 등록금을 벌어서 다녔다. 나는 그해 여름방학 때 단기간에 돈도 벌고 노동도 경험할 수 있는 공사판 노동을 하기로 했다. 그 이면에는 평소 내가 자주 생각하던 ‘이번 아니면 언제 해 보나’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서슬 퍼런 칼날이 춤추던 그 시절에 대학생 신분을 밝히면 공사장이나 공장 취업이 불가능했다. 당국에서 대학생들의 현장 활동을 금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뚫고 들어가려면 학력을 낮춰 속이는, 한마디로 위장 취업만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내가 선택한 공사장은 호암아트홀 건설현장.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호인 호암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는데, 지금은 서소문 끝자락 근린공원 맞은편에 검붉은 대리석을 두르고서 주변에 낡고 초라한 집들 위에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건물이다. 일단 공사장에 그냥 들어가서 건설사 직원처럼 생긴 사람에게 일자리 좀 알아보러 왔다 하니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물어보라 한다. 큰 키, 약간 마른 체구에 미남형으로 생긴 직원은 일용직 노가다를 관리하는 홍씨 성 가진 대리였다. 그는 나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고는 대뜸 대학생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준비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답이 나왔다. 고등학교만 나왔다, 군대 제대하고 아직 직장을 잡지 못했다, 일 좀 하려 한다고,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 나의 진지한 말투와 거짓을 안 할 것 같은 눈빛을 보고는 바로 일하라 하였다.
내가 할 일은 단순 작업이었다. 목재나 공사 자재를 트럭에서 내리는 하차 작업과 공사 폐기물을 트럭에 싣는 상차 작업이 주요 일거리였다. 철근 하차작업은 나름 전문가들이 하였다. 공구리(콘크리트 작업) 치는 무리가 철근을 트럭에서 내리는데 워낙 무거워서 우리 같은 단순 잡역부는 힘도 달릴뿐더러 요령이 없어 섣불리 대들다가는 다치기에 십상이었다.
대규모 공사장이라 그런지 단순 잡역부는 밥도 주지 않아서 도시락을 싸 왔다. 새참은 우유도 없이 빵 세 개만 나왔다. 일하다 좀 쉴라치면 오야지가 반말로 빨리 일하라 다그쳤다. 장유유서가 물구나무선 것이다. 나야 젊지만 나이 많은 인부들은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일해야 했다.
일이 단순하기에 일당도 적고 인부들도 나이가 많은 편이다. 그중 한 씨 아저씨가 오늘의 시詩 「현장」의 주인공이다. 나이는 오십 대였는데 담배도 안 피우고 순한 생김새에 마음씨도 착한 분이었다. 자식 같은 나에게 일 요령도 알려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다. 내가 대학생인 것을 속이고 들어 왔으므로 아저씨는 나에게 이런 데 오래 일하지 말고 공부해서 대학 가라고 충고도 해 주셨다. 한 씨 아저씨는 집이 가난해 막노동하며 살고 있지만, 교회 장로님이라 하셨다. 그러나 돈이 없어 헌금을 얼마 내지 못해 장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셨다. 종교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나 씁씁한 생각에 마음마저 무거웠다.
그해 여름, 약간의 육체노동을 통해 힘들게 일하며 사는 우리 이웃을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한恨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이것 역시 당시 젊은 층들 사이에 유행하던 ‘민중 속으로’를 흉내만 낸 것 같아 부끄럽다. 그리고 학교 가을 축제 때 내가 속한 문학회 서클 시화전에 「현장」 시를 내 걸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유치하다. 하지만 이십 대 때인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었다.
<현장>
새벽을 가른다 / 강남 사람들 기지개 켤 때
불도자 크레인 함마소리 속에서 / 또 하루가 시작된다
상전도 많아라 / 굽은 허리 쉴라치면
내리꽂는 눈초리들
십장의 고함소리 / 듣기도 싫지만은
처자식 생각하고 / 자리를 턴다
싸구려 일당신세 / 서럽기만 하고
자식 놈 못 가르쳐 / 한스러운 마음
새참 빵 세 개 / 마른 목 냉수로 축이고
한입 가득 한을 씹는다
하루일 마치면 어언 저녁 나절
가게집 들러 깡소주 한 컵 하고
어럴럴 상사듸오 / 흥얼대다 보면
시골집 생각 나 / 길게 한숨 짓는다
내일도 새벽이 오겠건만 / 들리지 않을 장닭소리 /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