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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존재

by 어니

어느 날 아침 어린이집 등원하는 길에 유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엄마, 학교 가면 노는 시간이 한 칸 밖에 없대.”

7살 반이라 어린이집에서 종종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 하루종일 노는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시간표의 ‘한 칸’밖에 안 노는 학교가 어린이에게는 머리에 잘 안 그려질 것이다.

“맞아. 학교는 노는 곳이 아니라 앉아서 배우고 공부하는 곳이어서 그래.

대신 학교는 오랫동안 있지 않고 금방 끝나. 어린이들은 오래 공부하면 안되거든. 학교 끝나고 놀면 돼.”

아이에게 이렇게 대답해주는 나는 어느새 마음속에서 내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지금의 나의 아이와 어느 면에선 비슷한 환경에서 보냈다. 대도시와 좀 떨어진 지방 소도시, 나는 거기서 초등시절 4년을 보내고 졸업했다. 학교생활에 대한 나의 기억은 교실에서의 기억은 많이 없고, 늘 놀았던 기억들 뿐이다.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친구들하고 얼음땡,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이름도 기억 안나는 여러 게임들을 하며 놀았던 기억, 친구 너덧과 학교 근처 산에 가서 계곡물에서 도롱뇽알, 개구리알 이런 것들 건져 올리며 놀았던 기억, 아파트 단지 뒷길로 걸으면 나오는 기찻길 따라 줄줄이 자전거 타고 시내에 나가서 놀다 온 기억. 시내에 있는 중학교 낡은 도서관에 가서 삼국지 빌려다 와서 읽었던 기억...

사람에게 기억에 용량이 있다면 내 기억의 많은 부분은 이 시절로 차 있는 것 같다. 그 때의 감정들이 지금의 내 정서 어딘가 밑바탕에 깔려, 떠올릴라 치면 금방이라도 다시 재생되곤 한다.


계곡물 속에 바위들을 들출 때 가재나 도룡뇽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그 설렘, 새까맣게 탈 정도로 밖에서 함께 뛰어 논 친구들과 쌓은 애정, 엄마 아빠와 눈 오는 밤에 나가 아무도 발자국 내지 않은 논두렁 길 걷던 기분, 방에 혼자 앉아 좋아하는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놓고 삼국지를 읽을 때 적벽대전 같은 대목에서 느꼈던 그 흥분감... 그 시절의 내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 ‘만족’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어른이 되고서, 자기 전에 유독 마음이 무겁거나 울적할 때, 많이 외롭고 불안할 때 종종 나는 ‘가장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보자’, 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 때 내가 좋아했던 나무 그루들과 꽃송이와 풀잎들의 기억, 경이와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그 느낌을 떠올린다.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심심하고도 느리게 흘러가는 유년시절을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온전히 나를 발견하는 그런 시간. 내가 살면서 나 스스로에 민감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런 시간에 길러진 감각이 아닐까. 나뿐 아니라 누구나에게 평생 마음 속에 숨긴 보석상자 같은 그런 놀이의 시간이 필요하다.

첫째의 초등 입학을 앞둔 요즘, 나는 어디서나 이런 말들을 듣는다. 요즘 입시는 옛날과 달라서 좋은 대학에 가려면 좋은 고등학교를 다녀야 하고 그러면 중학교는 고등학교 입시를 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야 하며 그러려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이미 선행학습이 필요하다는 그런 정보들. 아이를 미래에 적절하게 대비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스멀스멀 머리를 들면서도, 내가 아이에게 늘 주고 싶었던 그것에 대한 고집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보면 어릴 때 엄마도 항상 신문을 들춰보며 이런 새로운 대학 입시 정보들을 눈여겨 보셨던 것 같다. 부모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그런 정보들 사이에서 엄마는 어떻게 나의 유년시절을 행복이 좀 더 지속되도록 지켜줄 수 있었을까. 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는 내가 뒹굴고 놀다가 쓴 짧은 동화 한편을 엄마가 엄청 좋아해 주었던 기억이다. 그게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자존감이 되었다는 것을 엄마는 아실까.

아이를 키우며 나의 두려움과 책임감은 늘 도마 위에 오른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생을 살게 해주고 싶다는 종류의 그런 생각이 개중 가장 쥐약이다. 부모의 불만족이란 너무 쉽게 아이에게 들통나버리기 마련이니까. 늘 자기 일에 쫓기느라 바쁜 엄마가 아이들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을 조성해주고 있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염려도 늘 든다. 하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나의 조급함이 앞서 내가 아이들의 좋은 관찰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의 시선과 호기심이 무엇을 향하는지, 어떤 성취에 특별히 즐거워하는지, 무엇에 잘 몰두할 수 있는지 하는 것들... 어른의 눈에 하찮아보이는 아이의 만족을 그냥 넘겨버리고, 겉모습만 보게 되는 그 순간이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엄마가 많은 것을 세팅해놓고 아이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이 시대의 교육 방식이 내게는 왠지 아쉽다. 혹여나 내가 아이의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부정하거나 불만족스러워 하게 될까봐. 그러다 아이도 언젠가 자기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날이 올까봐.

학령 전환기를 앞두고, 나는 아이에게 마음 속으로 말한다. ‘진짜 재밌게 놀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시작이야.’ 더 자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아이가 더 다양하게 뻗어가는 관심과 재능으로 잘 노는 유년시절을 보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의 일과 휴식이 여전히 그 때의 놀이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닮아있듯이, 아이의 지금이 분명히 미래에 펼쳐갈 자신의 진정한 모습의 첫 태동기임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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