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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쓰기

불가능한 줄 알지만 가보는 마음

<하얼빈>, 그리고 <숨결이 바람 될 때>

by 어니

매번 새로운 책이나 논문을 열어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내가 이 글을 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래도 한번 읽어보자. 놀라운 것은 그래도 읽고 나면 단 몇십 프로라도 소화하게 되고, 그러면 그 이해를 기반으로 다음 읽을거리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씨름하는 가운데 내가 쓰는 논문이 한 줄 한 줄 깊이가 생기고 확장된다.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다. 나이를 먹어가고, 삶의 반경이 제한적이고, 우리의 이해와 시야와 자원은 늘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자꾸 한계가 없는 것처럼 나아가게 되는 마음, 어디론가 끊임없이 끌리는 마음, 그 마음 한복판에 무엇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한계를 알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영혼의 고귀함을 느낀다. 그런 사람들의 역사를 좋아한다. 길이 없는 상황에서도 내면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 한계를 두 눈으로 직시하면서도 그 빛을 인지하기를 그치지 않는 사람. 내 인생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하나 있다면, 그런 강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서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용감한 행동보다도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그의 강한 영혼이었다. 암흑 같은 현실 속에서 모두가 힘 있는 자의 논리를 따라갈 때, 그는 꺼지지 않는 마음의 빛을 따라간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종교적 신념, 인간의 도리와 내면에서 씨름하면서도 그를 이끌었던 마음의 끌림이 그를 하얼빈으로 데려간다. 자신의 그 내면의 빛을 이해하고자 하는 고뇌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안중근이 이토를 쐈던 1909년이라는 시점은 역사를 볼 때 깊어지는 암흑의 시작점일 뿐이다. 그의 의거 이후에도 수십 년간 후손들이 겪었던 굴욕을 생각하면 그의 행동은 무의미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가 흐르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더디게도 그 빛의 의미가 밝히 드러난다. 젊을 때부터 일찌감치 안중근의 젊음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김훈의 내면의 끌림도 같은 맥락이다. 엄두가 안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그 작업을 하고야 말아야 했다던 작가의 고백이 그의 소설 속 인물과 함께 공명한다.

매일 그런 고민 앞에 선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이 길은 승산이 있을까, 어떤 길만은 정말로 가고 싶지 않다, 오늘은 정말로 막힌 담 앞에 선 것만 같구나… 내가 그냥 멈춰 선다고 해서 아무도 나를 탓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못내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가운데 그럼에도 꺼뜨리고 싶지 않은 내면의 빛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일지 지금 다 드러나지 않는, 마음이 이끌어 가는 길이다.

이 글을 적는 오늘은 그게 뭐든 다 내려놓고만 싶은,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날이다. 아무도 같이 짊어져 주지 않는 고민을 혼자 짊어지고,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나의 마음의 끌림을, 나 혼자 바라봐주어야 하는 날이다. 엄마라는 역할의 옷을 입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늘 그 허망함에 마음이 힘들다. 내가 진짜로 하고자 하는 일에는, 결국 나말고는 아무도 관심이 없구나 하는. 내 인생 전체를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을지 모른다는 공허함과 무력감에도, 나 혼자 의미 있다 생각하는 일을 묵묵히 쌓아 가야 하는 시간이다. 노력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기는 해도, 내 안에 무언가를 끝까지 믿어야 하는 그런 오늘이다. 내게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아직 내게 시간이 남아있을 때, 내가 무엇으로든 채워 보내야 하는 오늘이므로. 그러니 나에게 조금만 더 용기가 있으면 좋겠다.

너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보는 곳마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뮤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I can’t go on. I’ll go on.)”

-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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