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시작, 45일간의 미국 로드 트립
새벽 6시, 차에서 눈을 떠 우리는 곧장 Carmel이라는 마을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빅서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이름처럼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넘치는 곳이었다. 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에는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고요히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한 분위기 속에 스며드는 차 한 잔의 온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앞으로의 차박 장소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45일의 일주 중 절반 이상을 차에서 자야 하기에, 어디에서 머물 수 있을지 찾아봐야 했다.
미국 고속도로에는 Rest Area라는 공간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최대 8시간 머물 수 있고, 화장실이나 스낵 자판기 같은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어 장거리 운전자들이 잠시 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REST AREA!!!!
구글 지도로 검색하니 고속도로 위 Rest Area가 수없이 많아 앞으로 이동하며 차박이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음의 짐을 덜고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직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시간이라서 조용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상점들이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을 선사했다.
이곳 Carmel은 해변가 마을로, 크램차우더가 유명하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먹은 것보다 맛있다는 얘기도 있어 기대감을 안고 식당을 찾아갔다.
바다와 맞닿은 호텔 1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에 앉았지만, 아침 메뉴만 판매하고 있어 크램차우더는 없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점심때부터 판매한다는 말을 듣고 아쉬움을 남긴 채 식당을 나왔다.
다른 식당들은 아직 열지 않았거나, 점심때부터 크램차우더를 팔았다.
"어차피 크램차우더를 지금 못 먹으니 좋은 자리에서 커피라도 마시자"라고 말했지만, 내 짝꿍은 "우리가 크램차우더를 먹으러 왔는데 안 판다면 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라며 단호했다. 나는 툴툴거리며 그의 뜻을 따랐다.
여행 중 우리 사이에는 늘 음식에 대한 작은 갈등이 생긴다. 나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방향이 틀어지더라도 가보는 사람인데, 짝꿍은 그저 가는 길에 있는 식당에서 해결하자는 사람이다. 비슷한 듯 다른 이 여행 스타일은 때로는 작은 충돌을 낳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양보로 흘러간다. 오늘은 그의 뜻에 따라 크램차우더를 포기하기로 했다.
Carmel 해변으로 향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했다. 수달이 360도로 회전하며 조개를 까먹고, 바다사자들이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소소한 행복감을 선사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미국 일주 4일 차. 나는 문득 이 여행이 퀘스트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계획으로 자유롭게 떠도는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가볍게 마음 가는 대로 걸으며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하는 걸 즐기는데, 이번 여행은 계획과 일정표 안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마음을 터놓고 짝꿍에게 말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숙제 같아."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계획에 얽매이는 게 때로는 힘들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계획을 벗어나면 불안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계획에서 벗어난 여행도 꽤나 괜찮은 경험일 수 있어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내 방식대로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구글맵을 보는데,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길에 Henry Cowell Redwoods State Park라는 주립공원이 있었다. 원래 계획에는 없던 곳이었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 잠시 들렀다. 킹스 캐년이나 세콰이어 파크 같은 큰 국립공원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빽빽하게 우거진 레드우드 숲의 신비로움이 눈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영화 '혹성탈출'의 배경지이기도 했다. 죽은 나무 아래에서 귀여운 "Banana Slug"도 보았는데, 웰컴 센터로 돌아와 할아버지께 만져도 되냐고 물어보니 "몰래 만지면 괜찮을 걸?"이라며 웃음을 띠고 대답하셨다. (알고 보니 이 "Banana Slug"를 보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럭키!)
숲을 걸으며 복잡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계획에 없던 주립공원에서의 시간은 우리의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주립공원에서 나와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보니 식당이 딱 하나가 나왔다.
호박 장식이 둘러싸인 이곳은 아늑했다. 우연히 들른 이곳에서 크램차우더와 햄버거를 주문해 Carmel에서 못 먹었던 아쉬움을 달랬다. 우리는 종종 "원하는 걸 당장 못 해도, 언젠가는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늦은 점심 후, 해변 절벽 위에 우뚝 선 The Ritz-Carlton 호텔에 도착했다. 하루 숙박비가 백만 원에 달하는 명성 높은 호텔이었다.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었고 전망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드넓은 농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호박 농장이 눈에 띄었다.
곳곳에 직접 키운 호박들이 놓여 있고, 커다란 간판에 "PUMPKINS"라고 적혀 있는 모습이 마치 "한번 들러 구경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차를 급히 세우고, 호박 농장에 자리한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직접 재배한 호박으로 만든 빵과 파이를 비롯해 못생겼지만 건강해 보이는 농작물들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일반 마트에서 파는 농산물에 비해 가격은 다소 비쌌지만, 짝꿍이 사과 파이를 먹어보고 싶다며 하나를 골랐다. 그렇게 사온 사과 파이는 설탕에 절여진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며 짜릿한 맛을 선사했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두 해 전에도 이곳에 와봤지만, 심각한 치안 문제로 인해 거리가 어두운 인상이 남아 있었다. 차털이와 절도가 심각해진 이곳은 $850 이하의 절도는 가볍게 처리되다 보니 많은 가게들이 폐점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서 영하 온도인 요세미티를 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ROSS에 들려 재킷, 히트텍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로 했다. 기분 탓인지 뭔가 험악한 분위기에 이곳의 ROSS는 보안요원들이 입구에서 입장을 도와주고, 계산을 하고 나갈 때도 영수증을 검사한다.
어찌저찌 쇼핑을 하고, 드디어 우리가 좋아하는 Marufuku Ramen 가게로 향했다. 차박을 하는데 찬바람을 막기 위해 뽁뽁이와, 좀 더 편안한 수면을 위해 차 가림막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라멘집으로 가는 길에 다이소가 있었다.
그래서 다이소에서 그동안 필요했던 물품들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고, 라멘 식당에 도착하였는데 역시나.. 너무 유명한 식당이라 웨이팅이 어마어마했다.
약 30분 정도 기다려서 라멘을 먹을 수 있었고, 묵직하고 고소한 라멘에 바삭한 가라아게, 차가운 맥주를 곁들인 그 맛은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나파밸리로 향하며 Rest Area에서 두 번째 차박을 했다.
미국 Rest Area 생생한 차박 후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