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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소설 <욕조>

당신만의 욕조는 무엇인가요?

by Ahnyoung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억지로 끌려 따라가던 서진이 연우를 세우고 물었다. 연우는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서진을 바라보다 차도로 뛰어든다.
서진이 소리 지르며 달려갔지만 늦었다.


5년 후
서진은 늘 그런 방식으로 피해버리는 연우가

소름 끼치게 밉고 싫었지만, 이렇게 떠나갈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말하지 왜’

서진은 이제 연우가 아닌 자신이 밉고 원망스럽다. 연우가 떠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그때의 일들이

또 사무치게 그립다. 현재도 과거도 아닌 시간을

살아가는 서진은 슬픔에도 무뎌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겨울 냄새가 꼭 그날 같다.
서진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따듯함을 느낀다. 온기가 느껴지나 밖에서 따라 들어온 겨울 냄새가
서진을 외롭게 한다.

애써 외롭지 않은 듯,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차가운 냄새를 피해 화장실로 도망간다.

옷을 다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좀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길 바랐으나 시간은 서진의 편은 아니었다.


5년 전
“ 왜 또? 화장실로 도망가게?” 말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연우.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또 욕조로 숨어들 모양이다. 욕조는 연우에게 쉼이자 퇴행의 공간이다.

연우를 계속 연우이게 하는 공간 욕조는 작은 바다 그러나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고인 물
힘을 내 일어서면 바닥이 닿는 작은 바다.

그러나 연우는 힘을 내지 못해 늘 그 안에 머문다.
그리고 영원히 그 안에 머물기로 다짐한다.

현실에서 욕조는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곳

서진은 몰랐다. 연우에게 욕조가 어떤 곳인지,

그저 다투기만 하면 피해버리는 연우가 답답하
화가 났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말해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2시간쯤이나 지나야 물기를
흘리며 터벅터벅 나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맥주 마실까?”하며 너스레를 떠는 연우를
그때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은 어쩔 수 없이 혹은 지쳐서 함께 맥주를 마시고 연우와 잠자리에 든다.

다툰 날은 유독 더 거칠게 서진을 안는 연우가 서진은 무섭기보다 안쓰럽 느껴졌다.

그래서 더 물으며 괴롭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우가 떠난 뒤 연우에게 욕조가 어떤 의미
인지 깨달았고, 그때는 이미 서진에게도 연우와 같이 그러한 이유에서 욕조가 필요해진 뒤였다.
다음 날 연우는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서진은 연우를
살피다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씻고 나온 서진은 연우에게 잘 잤냐고 묻는다.

연우는 빙그레 웃으면서 “응”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리고 더는 말이 없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분위기가 싫어 서진은 연우를 째려본다. 연우는 그냥 또 웃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나 출근할게, 너는 오늘 안나가?”
“응 쉬려고 좀 피곤하네. 저녁에 너 퇴근하고 밖에서 만날까? 너 좋아하는 이자카야 어때?”

자신을 위해준 듯한 연우의 대답에 금세 또 신이 난 서진은 대답했다.
“응! 정말 좋아! 그래도 점심 챙겨 먹고 나와야 해. 알았지?”
연우는 대답 없이 그냥 웃는다. 연우의 웃음이 공허하게 느껴졌지만, 서진은 출근 시간이 다 돼서
서둘러 나갔다. 서진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연우는 한숨을 쉰다.

답답한 공기가 느껴져 약을 하나 꺼내 먹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눕는다. 두 시간 정도 자고 눈을 떴으나 연우는 계속 그렇게 침대에 머문다.

깊은 우울함과 슬픔이 느껴져 또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서진이 없었다면 지금일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억지로 힘을 내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을 틀고 욕조에 채워지는 물을 바라본다.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이건 깨끗한 건가?’
욕조에 반사돼 푸른빛을 띠는 듯한 물이 연우를 안정시킨다. 깊은숨을 쉬고 욕조로 들어가
기대어 눕는다. ‘살 것 같다는 건 이런 건가?’ 연우가 잠시 생각한다.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욕조에 들어가 살 수 없으니 연우에게 삶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서진이 있기에 버틸만했던
삶. 연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건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연우의 깊은
슬픔을 다 걷어내지는 못했다. 가끔 연우는 아주 높은 꼭대기에서 곧 끊어질 것만 같은 얇은
줄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만난다. 간신히 버티는 삶의 끝자락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자신의 이런 감정이 서진에게 전염이라도 될까 염려하면서도 끝내 서진을 놔주지 못하고 매달려
있듯 그렇게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연우는 서진을 놔줄 방법을 찾기로 한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서진을 놔주는 것이 서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연우가 서진을 처음 만났던 날
연우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소심해 사람들과 거의 소통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없는 사람처럼, 그러나 할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 서진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다. 부서가 달라 자주 볼일은 없었지만
자신과 다르게 옆 사람을 치며 깔깔거리고 웃는 서진의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갔다. 목소리가
호탕하고 밝은 에너지에 연우는 순간 ‘나도 저렇게 웃어 볼까’ 싶을 만큼 매료됐다.

연우가 사람에게 관심이 생긴 것은 중학교 때 옆 반 친구였고,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또 다른 연우 말고
는 처음이었다. 서진은 많은 사람과 친하게 지냈고 늘 바빴다. 여기 참견, 저기 참견.
연우는 그런 서진의 모습이 점점 귀엽게 느껴져 참을 수 없을 때쯤,
“연우 선배님, 저랑 저녁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갑자기 왜요? 저잘 모르시지 않나요.” 내심 반갑게 느껴지면서도 연우는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 얼떨떨하게 대답해 버리고 나서 후회했다. 그래도 서진은 굴하지 않고 더 씩씩하게
같이 먹자며 연우의 팔짱을 끼고 끌어당겼다. 연우는 싫지 않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연우는 서진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듣기로 서진은

이미 연우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었다고 했다.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었다. 서진은 연우의 외모도
말투도, 성격도 다 상관없었다. 그냥 연우여서 좋았다고 했다. 모든 게 좋았다고 했다,
좋아지고 나니 연우의 얼굴, 연우의 목소리, 연우의 성격이 다 연우가 좋은 이유였다고 했다.
연우에게도 처음으로 안전한 공간이 생겼다. 사람이라는 공간.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공간
은 좁아졌고 이내 없어져 버렸다. 연우에게 서진은 더는 기댈 공간이 아닌 연우 자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5년 후
“서진 언니, 연우 언니 생각하고 있어요?” 회사 동생 세희가 묻는다.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던 서진은 그냥 웃는다.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마워할 만큼의 힘이 없다.
세희는 여전히 살뜰하게 서진을 챙긴다.
‘그때 그 사진을 내가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연우가 지금 여기에 있을까’ 결국 다시 연우 생각
으로 돌아간다. 늘 표현이 없고 조용한 연우를 조르고 졸라 찍은 기념사진. 그때는 몰랐다.

그게 연우와 서진의 마지막 사진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서진은 빨리 퇴근하고 싶다. 얼른 집으로 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다고 생각한다.


1시간 후
욕조 안, 서진은 생각한다. 그날을
그렇게 연우를 보내지 말 것을. 후회해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잠시 눈을 감고 욕조 안 물 위에서 몸을 띄운다. 조금만 힘을 주고
일어서면 발이 닿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진은 연우를 생각하느라 다리에 힘을 풀어버린다.
아늑하고 따뜻하지만, 생명이 살 수 없는 곳.

시끄럽고 분주한 소리
서진이 눈을 떠보니 병원이다. 괜찮으냐는 의사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서진은 하염없이
울었다. 1시간, 2시간 그저 계속 눈물만 흘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진은 연우에게 팔짱 끼며 환하게 웃던 날을 떠올렸다. 그 상상 속 자신이 너무 밝게 웃고 있어 슬플 지경이었다. 서진은 생각했다. ‘내가 저렇게 밝은 사람이었던가'
연우가 떠난 뒤 감정을 잃어버린 듯 살았던 서진. 작은 바다를 건너 희미한 희망을 바라본다.

그리고 서진은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실패한 자살에 대한 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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