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예찬 일기
평소와 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출근이었다. 오전 5시 50분에 기상하자마자 왜 오늘도 출근해야 하는지 도대체 주말은 언제 오는 것인지 한 차례 생각했다. 생각을 마친 뒤 의례적인 몸놀림으로 씻고, 화장을 하고 전날 다려 놓은 옷을 입었다. 색깔 별로 5개씩 산 치마와 셔츠 중 남색 치마와 하얀색 셔츠를 입었다.
오전 6시 20분 집 밖을 나서기 전 현관에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매일 신는 전투화 같은 구두, 일주일 동안 색깔만 달라지는 셔츠와 치마, 그리고 무표정의 얼굴. 이 정도면 만족한다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사실 만족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오전 6시 30분까지만 집에서 나오면 된다.
북한산의 차가운 공기를 폐부에 가득 채우며, 귓가를 넘나드는 물소리를 느끼며 여유 있게 걸었다. 여하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출근길이었다.
아. 평소와 다른 점은 한 가지 있었다. 그날따라 출근 길이 조금 더 밝았다. 밝은 기운에 이끌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머리 위로 딱 저만치만 맑게 개인 하늘이 보였다. 이상했다. 분명히 여느 출근길과는 다르게 더 밝았고, 날씨가 오랜만에 좋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참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걸음을 떼었다. 여전히 밝았다.
하늘은 짓궂었지만 내 출근길의 하늘은 다정했다. 행복감이 몰려왔다. 행복이 내 머리 위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아야만 알 수 있는, 사람마다 일정량 채워야 하는 행복이었다. 내 머리 위로 맑게 개인 하늘만큼만 행복해도 내 하루는 맑게 갰다. 딱 저만치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행복이 내 머리 위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내 머리 위로 맑게 개인 하늘만큼만
행복해도 내 하루는 맑게 갰다.
딱 저만치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할당량이란 몫을 갈라 나눈 양이다. 하루 행복 할당량은 하루 동안 행복해야 할 내 몫의 양이다. 하루 동안 최소 이만큼은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출근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순간을 고정했다. 행복감을 고정한 채 다시 출근길을 걸어 나갔다. 평소와는 다른 출근길이었다.
매일 아침 여의도역 앞에서 커피를 사 들고 출근한다. 원래는 라테를 주로 사 먹었는데, 변비가 심해진 탓에 콜드브루스위트라테를 사 먹는다. (달달한 라테는 내 변비에 도움이 된다.)
여의도역에서 커피를 수령하려면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을 하기 전 효창공원 앞역에서 미리 커피를 주문해 놔야 한다. 비슷한 시간 주문을 하는 탓에 주문번호는 항상 18번이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18번이지만, 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매일 아침 18번째 커피를 받아 마시는 상황이 웃겼다. 내 앞에 1번부터 17번까지의 사람들도 항상 똑같을지 궁금해졌다. 매일 17명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출근길이다.
여의도역 개찰구에서 나왔다. 2번 출구로 나가야 제일 빨리 나갈 수 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몰린다. 꽈리를 튼 뱀과 같은 줄을 기다리기 싫어서 그날은 5번 출구로 나왔다. 기다란 횡단보도를 건너야 해서 신호를 기다렸다.
생명력의 색깔을 지닌 연녹색 사철나무 잎사귀들이 나와 같이 기다렸다. 도란도란 정답게 내려앉은 오전 7시 40분의 아침 햇살도 같이 기다렸다. 횡단보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면을 철갑으로 두른 빌딩들은 햇살 앞에 무력하기에 분홍빛, 주황빛으로 물들고 만다. 신호가 바뀌고 하얀색 구름 위를 골라 밟는다. 기분이 구름을 타고 붕붕 떠오른다. 매일 나를 기다리는 18번째 커피를 들고 회사로 향한다.
무채색의 출근길이 색채를 덧입었다. 내 하루는 맑게 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