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크고 작은 진통을 겪으며 마을 반상회도 결성했고 간판 교체, 화단 조성, 차 없는 거리까지 지정해 골목 정비를 마쳤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진 않았다.
"이제 우리 뭐해요? 다 해놔도 개미 한 마리 안 지나 댕기네요.", "그러게요. 아하. 아하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답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며 넘겼다. 친절하지만 무능해 보였다.
무려 1년 동안 골목에 파견까지 나와있었는데 소위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실적'이랄 게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비 후 계획도 없었나 보다. 그저 골목만 정비하고 나면 주민들끼리도 갑자기 다 잘 지내고 하하 호호하며 마을이 살아 날 줄 알았나.
마을 만들기 사업, 주민조직화 사업이란 게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지역에 맞는 뭔갈 해야 되고, 해야 되는데... 어? 오? 아! 플리마켓? 플리마켓! 플리마켓 열기엔 골목이 딱이네! 머릿속으로 주저리주저리 하던,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 끝에 플리마켓이라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신이 난 나는 당장 손에 잡히는 이면지에 연필로 슥슥 적어 A4 한 장에 빼곡히 실행 계획과 기대효과 등을 적어 과장님과 부관장님을 불러 자랑스럽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과장님께서 내 계획을 다 들으시고는 "그 얘기를 주민들 입에서 나오게 해야 되지 않을까.", "네?" 맞다. 깨진 화분 사건 잊었어? 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하자고 해야 주인 의식도 가지고 나-중에 복지관이 빠지더라도 자생할 수 있게 되잖아. 과장님의 피드백은 너무나 정확했고, 그렇게 해야만 하지만, 이거 못하겠네.
앞이 캄캄했다. 아니 플리마켓이 뭔지도 모를 건데. 보물섬 지도처럼 대단해 보였던 계획서는 그저 악필로 끄적인, 남루하기 짝이 없는 이면지가 되어 갈 곳을 잃은 채 사무실 책상 위를 배회했다.
흠. 까짓것 뭐라도 해봐야 될 거 아냐. 오케이, 이제 반대로 내가 주민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이제 우리 뭐해요?"
골목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이제 뭐 할까요? 뭐 했으면 좋겠어요?"와 같은 질문들을 했고 그때마다 "그래 우리 이제 뭐 하면 좋겠노."라며 메아리로 돌아왔다. 하. 이거 쉽지 않네.
건 2개월 동안 진행된 욕구조사. 질문을 바꿔 "여행 가거나 어디 놀러 가면 뭐 하세요? 어떤 거 구경하는 걸 좋아하세요?"와 같이 조금은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주민1 : "여행 가면 뭐 거기 유명한 거 있는대서 사진 찍고 하지." 주민2 : "공연 보는 거 좋아한다." 주민3 : "뭐 사 먹는 게 최고지." 주민4 : "나는 아기자기한 물건 사는 거 좋아한다. 그 벼룩시장 같은 거 있다이가." 나 : "아! 플리마켓이요!" 주민4 : "플리마켓이 뭐고." 나 : "아... 그 벼룩시장을 영어로 플리마켓이라고 해요." 주민4 : "그래 그 프리마켓. 그거 좋아한다." 나 : "그거 우리 골목에서 하면 좋겠네요!"
오예! 속으로 만세를 오억 오천번 외쳤다. 역시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는구나. 근데 나 너무 의도적이냐. 여하튼 주민 만남을 통해 얻은 욕구를 정리해 '우리 골목에서 하고 싶은 것들' 설문지를 만들었다.
전체 골목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45%의 응답률로 플리마켓이 뽑혔다. 주민들과 내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주민 반상회를 통해 설문 결과를 공유했고 어떻게 진행할 건지 회의했다. 플리마켓. 우선 이름부터가 문제였다. "서울에서 그런 거 많이 한다던데.", "통영에서 그런 거 하면 누가 오기나 하겠소?", "근데 플리마켓이 머시고. 이름이 어렵네. 프리마켓이 부르기 편하네.", "자유로운 장터라는 이름도 좋네요. 이해도 잘되고." 골목 주민들끼리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며 '강구안 골목 프리마켓'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주민1 : "근데 이거 누가 할낍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 깁니까?" 주민2 : "우리는 다 업이 있기 때문에 운영은 힘들 거 같은데." 나 : "셀러들 모으고, 홍보하고, 이런 건 복지관에서 하겠습니다. 대신 주민분들은 본인들 가게 앞에 앉을 수 있게 자리를 내어 주세요."
본인 가게 앞에 다른 셀러가 앉는 다라. 어찌 보면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지만 셀러들은 기성품을 판매하는 게 아닌 중고물품이나 수공예품 등 직접 만들어 온 분들만 참여할 수 있게 제한하니 주민분들도 흔쾌히 협조해 주셨다.
프리마켓이 열리던 날 아침, 주민분들이 나와 쓰레기를 줍고 가게 앞을 쓸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렇게 통영 최초의 정기 프리마켓인 '강구안 골목 프리마켓'이 주민들의 손으로 대서사의 서막을 열며 골목에도 봄이 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