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이는 학교 후배들과의 술자리. 이 모임에서는 내가 제일 연장자다. 오늘의 만남은 몇 일전 헤어진 한 후배를 위로해주기 위한 자리다. 평소 내 주변 지인들에게도 포장이나 어설픈 동정따위를 하지 않는 필자이기에, 모임 장소로 이동하며 과연 그 후배가 위로받을만한 자격이 있을까 없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맛있는 곱창을 먹으며, 후배에게 직접 그동안 일어났던 얘기들을 들었다.
"상대방에게 내 치부를 들켰어. 지금까지 그런 모습 한 번도 안 보였는데, 그 모습을 보여주게 되서 너무 창피하고 괴로워.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그 사람에게 좋은 추억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고 떠나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사실 이 후배는 남자친구에게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지만 착한 남자친구를 외면할 수 없어 계속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남자친구에게 돌아선 자신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해두었던 것을 들켰고 남자친구는 많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후배는 진짜로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미련이 남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 사람한테는 미련이 하나도 없어. 근데 이제 그 사람은 나를 정말 나쁘게 볼 거 아니야. 난 그게 너무 괴로워. 지금까지 정말 좋은 여자로 알고 있었을텐데 날 욕하고 원망하겠지...? 아마 그 사람은 나에게 실망해서 미련조차도 없을꺼야... 완전 가식적이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할꺼야... 진짜 그게 너무 괴로워. 그 사람과 헤어지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는데..."
나는 후배의 말에 참 가슴이 저렸다. 나약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 본능. 그리고 그 보호 본능으로 인한 어설픈 배려가 결국 남자친구와 후배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기 떄문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실수도 한다. 이 사실은 어느 누구나 인정하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이 단순한 사실을 적용시키지 않을 때가 많다. 어딘가에서 들었던 치졸한 사람, 나약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사악한 사람의 대상에서 '나'는 제외시킨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아닐 것이라고 합리화시킨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정말로 평생동안 '좋은'사람, '행복한'사람, '완벽한'사람, '긍정적인'사람이었는가? 가족, 친구, 연인, 스쳐지나가는 인연 중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이 없었으며,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 모두 옳았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단언컨데 당신은 아직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가식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진리'라는 것은 아직까지 밝혀지거나 발견되지 않았다. 언제나 옳은 어떤 것,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이와 함께 사람도 변한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고, 행복함을 느끼며, 완벽하게 살고, 긍적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고, 때로는 괴로우며, 때로는 상처받는다. 그리고 때때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처참히 무너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부족한 모습의 '나'도 진정한 '나'의 모습중의 하나다. 때로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 범죄를 저지를 때도 있으며, 이기적인 태도로 일관할 때도 있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기도 하는 모든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결국 우리의 모습 중에 일부일 뿐이다.
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금의 진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부족한 '나'를 더 나은 '나'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조금씩 성숙하게 만든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고, 나의 주장과 행동이 틀렸다면 인정하며, 무심코 남에게 피해를 준 나의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할 줄 아는 것. 우리가 입을 모아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진정으로 인정해야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그것도 진짜 너의 모습이야. 다른 사람에게 나를 포장하는 짓은 평생 할 수 없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있지. 네가 남자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관계를 끝맺지 않고 있던 것, 남자친구에게 나쁜 여자친구였던 것. 그 모든 모습들도 너의 모습 중 일부인 거야. 너는 이런 모습들이 너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때문에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거고.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해야 지금의 괴로움과 힘듦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성숙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줄 아는 거야. 그래야 그 결점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행동들을 하지."
후배는 어떤 생각이 든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허공을 바라본 채 무언가를 생각했다.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와 헤어지며 그 후배는 말했다.
"나, 지금 힘들고 괴로운 건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네. 근데 이제 한 번 그 힘들고 괴로운 걸 다 느껴보려고."
적어도 나는 그 후배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사실 '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날 것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 당시의 나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당신은 적어도 어제보다 성숙한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예전에 다이어리에 적어놓았던 문구를 인용해본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에 있다.'
- Nelson Mandela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인권운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