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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씨 Nov 12. 2024

밤의 낭만

깊어질수록 취해도 좋은, 나만의 밤이 있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잠들기 전, 소주 한 잔을 마신다고.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사투리 속에 술기운이 섞여,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 말은 오래전 기억을 불러냈다. 고향 정선의 낡은 집, 툇마루 위에 앉아 별을 바라보며 천천히 소주를 마시던 밤들. 하지만 친구의 생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바쁜 일상 속에서 소주 한 잔으로 겨우 평온을 찾는 것일 테다. 나는 그걸 나름대로 이해했다.


문득 생각했다. 이 밤의 낭만은 어쩌면 소주 한 잔 같은 것이 아닐까? 어둠이 깊어질수록 취해도 좋은 시간, 그러나 숙취는 없는 그런 시간 말이다. 내가 아는 밤은 그런 것이다. 낮의 소란과 분주함이 잠잠해지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밤은 온전히 나에게만 속해 있다.


밤의 취기는 독하지 않다. 아침이 오면 깨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둠을 보내는 동안에는 끝없이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든다. 희미한 달빛 아래로 예미산을 내려가는 느낌처럼. 나의 밤은 스스로 투명해지는 시간이다.


어떤 가식도, 방어도 없이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 낮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며 살지 않았던가. 사소한 문제와 별것 아닌 갈등, 어쩌다 마주친 사람에게 애써 지어 보이는 미소까지. 그러나 밤이 오면 그런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침내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모든 감각이 천천히 깨어난다. 밤은 속삭인다. “이게 진짜 너야.”


밤이 주는 용기는 때로 유치한 고백을 하게 만든다. 낮에는 어색하고 쑥스러웠던 말들이 밤에는 마치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쉽게 새어 나온다. 사랑한다면, ‘보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 그것은 낮의 이성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밤의 감성 안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문자를 보내는 그 감정은 낯선 밤의 온기를 타고 조용히 피어오른다.


밤은 감정의 역류를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영화를 본다면, 화면 속 주인공의 감정이 내 안의 무언가를 흔들어 놓는다. 슬픔에는 눈물이 따라오고, 기쁨에는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그 영화는 단순히 화면 속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밤은 감정을 깊이 느끼게 하고, 고통조차 달콤한 여운으로 바꾼다. 그 순간, 영화 속 장면들이 내 삶과 겹쳐진다. ‘나에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 되묻게 된다.


사진첩을 열어 본다면 오래된 내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사진 속 나는 지금의 나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간절함이 스쳐 지나간 눈빛과 가슴 한편을 저미는 미소들.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겹쳐지면서도 묘하게 낯설다. 어떤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아려 온다. 그것이 그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단순히 추억의 흔적일 뿐인지 알 수 없지만.


밤은 모든 감정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잠들기 전 소주 한 잔으로 평온을 찾겠지만, 나에게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잠기는 것이 나만의 소주 한 잔이다. 취해도 숙취는 남지 않는, 아침이면 사라질 감정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깊이 빠져들 수 있다.


홀로 밤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어딘가 조금 더 진짜 나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천천히, 남은 온기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는다. 이 밤의 끝에서.


“취해도 숙취 걱정 없는 나만의 깊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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