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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풍가도 Nov 18. 2024

따뜻한 봄날엔 낮잠을 자고 싶다.(4)

#4. 내 무릎의 목소리

  “살을 좀 빼고 운동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두둥...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내가 비만이라니...

당시 몸무게는 아마 76kg 정도 나갔던 걸로 기억된다. 177cm에 76kg면 딱 대한민국 표준 아니었던가? 그런데 살을 빼야 한다니... 당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의사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진짜 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셨다. 친절히 무릎운동은 어떤 걸 해야 하고, 그 운동을 하면 어느 부위에 근육이 붙는지 손수 시범까지 보여주셨다. 그래서 당시 더 심각하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때는 바야흐로 서른 전후였던 것 같다. 

당시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생활패턴이 아주 다이내믹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스케줄이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었다. 다른 이들의 새벽 출근을 보고 잠을 잤었고, 오후 늦게 일어나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출근하는 게 다반사였다. 더군다나 서른 살 총각이 혼자 살고 있으니 딱히 부지런함이나 정돈된 느낌도 아니었다. 또한 이런 생활패턴에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분자식 H2O. 영어로는 Water라고 하고 물이라고 흔히 부르는 녀석이 있다. 물은 무색무취에 무맛이 정상이다. 그렇다. 나에게는 물이라는 존재는 너무 맛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을 절대 내 냉장고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물 말고도 그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청량감과 달콤함, 때로는 알싸함과 시원함을 주는 더 멋진 녀석들이 있는데 내가 왜? 굳이 이렇게 아무 색깔도 없고 맛도 없고, 멋대가리 없는 녀석에게 내 냉장고의 소중한 한편을 내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난 타협의 의지가 없었다.

눈을 떠서 목마름을 느껴 냉장고를 열면 항상 형형색색의, 하지만 물과는 차원이 다른 멋진 녀석들이 나를 반겨줬다. 그 반가움을 입안과 식도, 위장까지 여과 없이 온몸으로 투명하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이처럼 사랑했다. 내 무릎의 절규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형, 살려줘. 나 죽을 거 같아'

어느 날 내 무릎이 신호를 보내왔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는 듯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냉증 같은 게 찾아왔다. 젊을 때는 다 그렇듯이 '시간이 약이다.'라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려 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서 있는 시간이 많아 뭐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 수업을 최대한 앉아서도 진행해 보곤 했었는데 큰 차도가 없었다.

병원은 특유의 냄새가 있다. 정확히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냄새만 맡아도 아픈 느낌이랄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물론 눈물 그렁까지는 아니었지만 데스크의 간호사님께 접수를 하니 내 표정을 보며 많이 아프냐고 물어보셨다. '아파서 이런 표정이 아니라고요...'

학교 과학시간에 조건반사, 무조건반사 실험이 기억나는가? 무릎반사 실험이라고도 불린다. 의사 선생님의 조그맣지만 옹골지게 단단해 보이는, 사람 간 모양처럼 생긴 망치로 내 무릎을 톡. 톡. 칠 때마다 내 다리는 네! 네! 하고 힘차게 대답하듯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재미를 느꼈던 기억도 난다. 이후 선생님의 이곳저곳 조물거림과 뭔가 차가운 느낌 엑스레이 검사까지 끝난 후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 서두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은 사진이나 간 망치 및 손맛의 결과 큰 이상은 없다고 하셨다. 단지 몸무게가 1kg이 늘어나면 무릎에서 받는 하중은 3kg이 늘어나는 거니 몸무게를 줄이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 하셨다. 어릴 적 너무 말라서 살찌는 약까지 먹었던 나에게는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무릎으로의 이해로 태어나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안녕... 비록 내가 널 떠나지만 함께했던 추억들은 평생 간직할게.'

병원을 다녀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냉장고에 있는 맛깔난 녀석들과 이별을 고하고 색깔도 없도 맛도 없는, 그 멋대가리 없는 녀석을 내 냉장고의 세입자로 들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에도 시간이 필요한 법. 목이 말라도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아 한동안 냉장고의 물이 줄어들지를 않았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냥 닫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정말 타는듯한 갈증에 항복할 정도가 되어야 겨우 목만 축이는 정도였다.

그렇게 새로운 녀석과 한동안의 밀당 끝에 어느샌가 나는 삶에 순응하기로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포기가 빠르다.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그렇게 멋대가리 없는 녀석에게 순응하고 보니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변화가 찾아왔다. 몸무게가 너무 빨리 빠지는 거였다. 물론 헬스도 그때 시작했지만 암만 생각해 봐도 그 영향은 미미했던 것 같다. 1달간 거의 8kg 정도가 빠진 것이었다. 이게 의학적으로 생리학적으로 가능한 건가?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서 단언하신 대로 그 이후로 무릎통증도 사라졌다. 역시 배운 사람들 말은 잘 들어야 한다는 걸 또다시 느꼈다.   


중학교시절부터 친구였던 놈 하나가 있다. 

비록 재미는 좀 없지만 항상 모범적이고 착한 놈이다. 이 친구는 참 말이 많다. 특히 나랑 얘기하고 있으면 절반 이상은 나에 대한 잔소리다. 

"인생이 장난이냐, 열심히 좀 살자"

"야, 장난스럽게 좀 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남자는 상투를 틀어야 남자지. 결혼부터 하지?"

 장난으로 매번 나는 귀에 피가 날 거 같다고 핀잔을 주지만,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친구다.


인간관계가 그런 것 같다. 나에게 달콤한 향기를 보여주고 띄워주는 사람들은 소위 콜라 같은, 정작 내 인생에 도움이 되고 득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멋대가리 없는, 물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냉장고에서 콜라를 치우고 물은 채운 것처럼, 나도 내 인생에 물 같은 사람들을 채우고 싶다. 그 옛날 다이어트를 했던 것처럼, 이제는 삶의 다이어트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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