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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풍가도 Nov 19. 2024

따뜻한 봄날엔 낮잠을 자고 싶다.(5)

#5. 일기장에 날씨 말고 볼게 뭐가 있다고!

오늘도 나는 한적한 카페에 앉아 이것저것 끄적인다.

 

결말을 맺지 못하는 끄적임이 대부분이지만 이런 끄적임을 좋아한다. 꼭 끄적임에 목적이, 결론이 필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얀, 그렇다고 너무 새하얀은 아닌 줄칸 노트에 커터칼로 매끄럽지는 못하게 깎은 연필을 쥐고 뭔가를 끄적이다 보면 내가 모르는 큰 세상을 창조하는 기분이 든다. 

아마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쓰는 사람도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물론 나의 세상 창조는 대부분 구름 한 조각 정도 만들고 끝이 나는 게 대부분이지만서도 말이다.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것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뭔가 일하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있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연필도 마찬가지로 연필 머리에 지우개를 뒤집어쓰고 있는 노르스름한 연필이 제격이다. 끄적이는 재주가 별로 없는 나에겐 이런 아이템들이라도 들어야 뭔가 쓰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그랬다. 실력은 장비빨이라고.

음... 그런데 나의 이 끄적임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누군가 어릴 적 방학숙제로 가장 싫었던 숙제가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연코 일기 쓰기라고 말할 것이다. 

포털에 일기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날마다 자신이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등을 사실대로 적은 기록이라고 나온다. 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가혹한 단어인가. 

날마다라니! 어찌 매일매일이 새롭고 의미 있는 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발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학교 방학숙제를 시작으로 부모님께서는 평소에도 일기 쓰기를 강조하셨고, 매일 밤 자기 전에 엄마에게 일기장 검사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기껏해야 국민학교 다니는 꼬맹이에게 무슨 인생의 특별한 일이 생기는 날이 많았겠는가? 

그러다 보니 항상 나의 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 일기도 울고 갈 날씨 기록 위주로 적히고 있었다.


'1990년 7월 2일 화요일 날씨 흐리다 맑음, 오늘은 배가 아파 학교에서 우유를 먹지 않았다. 짝꿍 성수가 내 우유를 달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우유를 2개 먹으면 배가 아플 거라 생각했다. 이제 꿈나라로 들어가야겠다.'


???


난 나름 그날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고 적었건만 엄마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왜 항상 '다'로만 끝남의 연속이냐고... 그래서 바꿔보았다.


'1990년 7월 5일 금요일 날씨 맑음, 오늘은 복도에서 준모와 장난을 쳤다. 선생님께서 벌로 창고 의자를 옮기라고 하셨다. 왜 복도에서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나는 나름 머리를 써서 물음표를 하나 넣어보았고, 또 몇 번의 엄마 잔소리에 나중에는 느낌표도 넣어보았다. 

항상 마침표만 있던 내 일기장은 그렇게 물음표와 느낌표, 따옴표등이 추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민학교 생활동안 자의(10%) 타의(90%)로 일기를 꾸준히 쓰게 되었던 것이었다.




내 방 책장 한켠에는 어릴 적 썼던 일기장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사를 다닐 때도 부모님께서는 다른 건 몰라도 내 일기장은 꼭 챙겨주셨다. 아들에게 다른 것보다 소중한 추억은 꼭 물려주고 싶으셨으리라.

이제는 다 낡아서 노트 묶음을 스카치테이프로  발라둔 것도 있고, 그 언젠가 어린 소년 감성이 북 차올라 당시 유행했던 미니앨범 스타일의 일기장도 보인다. 

분명 미니앨범을 쓸 당시에는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으리라. 


1년에 한 번쯤은 먼지도 털어줄 겸 해서 어릴 적 기억을 몰래 숨겨둔 과자 꺼내먹듯이 들춰보곤 한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어릴 적 나에게 주고 싶었던 건 일기라기보단 이 끄적거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그 어린 시절 특별한 것 없어도 일단 끄적거려 보는 것. 끄적이다 보면 나중에 그 끄적임이 내 삶에 화려한 나바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누군가가 말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내'가 함께하는 여행이라고. 이런 끄적임도 그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목적이나 결론이 없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와 '내'가 발가벗고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진지한 행위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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