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 폴리 아 되 (2024,토드 필립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1편이 세계적인 흥행을 한 후 전세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개봉하고 갖은 비난을 받고있는 조커2다. 왜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조롱을 하고 4/5점을 준 이동진을 겨냥할까. 영화 관람의 세계는 참 재밌다. 생각보다 야만적이기 때문이다.
조커1은 강력한 영화다. 영화 내내 한 사람의 정신이 평생에 걸쳐 함몰되어가는 시련을 부여하고 압력을 못이겨 끝내 분출하는 상황을 극의 하이라이트로 넣으며 저항적인 카타르시스를 부여한다.
여기서 도덕적인 판결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어서 감독은 조커의 행동을 변호하지 않는다. 생중계되던 카메라에 비친 모습을 통해 섬뜩하고 잘못되었음을 드러낸 후, 그의 모습에 젖어들어 광기에 빠진 군중 사이에서 치켜세워지며 폭동의 왕으로 잠깐 선 후 영화는 끝이 난다. 이때 중요한건 감독은 조커라는 상징과 아서 플랙이라는 인물을 괴리시켜 두었다는 점이다. 폭도들이 지켜세운건 아서 플랙이 아니라 조커라는 폭력과 저항의 상징물이고, 이는 신성시가 아니라 대의명분이자 방패막으로 쓰인다. 그렇기에 폭도들은 조커를 지키기 위한 성전에서 조커 가면을 쓰는게 아니라 개인적인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때 조커 가면을 써서 그들 자신을 보호한다. 마치 조커의 정신 아래에서 그들이 움직였음을 말하려는 듯이다. 이는 그저 두꺼운 핑계가 생겼을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서 플랙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가려져있고 존중받지 못하며 오히려 조커를 향한 인기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어정쩡하게 두 손을 치켜드는 모습이 우습고 처량하다. 여전히 아서 플랙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런 연출과 별개로 이미 폭도들은 불을 질렀듯이 실제 세상 속에서도 조커의 이름으로 대리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은 일어났고 이들의 행동은 조커라는 영화 작품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범죄자들이 원하는 대로 조커라는 방패는 작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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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조커2를 비난하는 대부분의 의견은 ‘조커는 분노 표출자’라는 표면적 인상을 기억하고 기대한 채 관람했을 때 나오는 반응인 듯 하다.
그러나 감독이 조커1에서 그랬듯 핵심적으로 다룬 내용은 여전히 ‘조커’와 ‘아서 플랙’의 괴리였다. 다만 괴리를 표현하고 집중하는 과정에서 조커1편과 다 조커로서의 폭발적인 행동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원하던 범죄적 카타르시스가 전혀 채워지지 못함으로써 관람 경험에 큰 실망을 준 상황으로 여겨진다.
또한 결정적인 단점으로 관람 경험에 불편함을 주는 편집적 문제로 뮤지컬 씬들의 시간과 횟수, 연출적 단일함이 있다. 조커가 할리를 만나 노래의 판타지로 빠지는 장면은 그들만이 이해하고 몰입하는 초현실적 도피 세상이라는 점은 모두가 알아 챌 수있을만큼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나온다. 문제는 이미 이해되고 간파된 표현법이 반복되면 지루하다는 것이다. 매 뮤지컬 씬은 물론 뮤지컬로서는 다양하게 연출되었으나 결국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했다. ‘도피적 환상’. 충분히 관객이 인지했음에도 각 뮤지컬 씬은 3분 내외로 지속되었고 반복 횟수는 6회 이상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3회 이상부터는 지루함을 느끼다 5,6회 째에는 짜증이 났다. 이 지점에서 보통의 뮤지컬 영화들과의 차이가 있다.
첫째로, 뮤지컬 영화로서 바라보기엔 장면의 아름다움이 적다. 독창성 또한 그렇다. 대부분 잘 알려진 옛 팝송을 노래한다. 심지어 30대인 내가 보기에도 향수가 없는 올드 팝송이라 노래 자체가 주는 아련함도 없었다. 한 두곡의 자작곡으로 보이는 곡도 있었으나 그 노래가 아름답진 않았다.
둘째로, 노래를 원하는 뮤지컬 영화의 서사들과 다르게 조커2에서는 노래는 현실의 서사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도피적인 장면이자 서사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당장에 극 진행에서 계속해서 이탈한다는 점이다. 이는 의도된 바이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해졌기 때문에 관객들은 극중 주변인들 처럼 불편함과 짜증을 유발한다.
극의 마지막에 아서 플랙은 할리에게 ‘노래하지말고 말로해’라고 애원하지만 할리는 노래를 이어가며 그를 떠난다. 처음으로 노래의 세계 바깥의 있는 관찰자가 느끼는 벽이 표현되는 시점이다. 이 순간 영화 내내 이어졌던 노래 장면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나 앞서 말했던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는 좀 더 매끄럽게 편집될 수 있었던 부분이라 생각된다.
예를들면 극중 간수나 주변 인물 등 뮤지컬 세계 바깥에 놓여있는 관찰자의 시점을 보여주거나 그들에 의해 뮤지컬 세계가 중단되는 등의 장면을 통해 뮤지컬 세계를 묘사하는 다양한 연출이 있었다면 뮤지컬 연출이 기능적으로 유지되면서도 지루함은 줄어들고 오히려 그 세계에 대한 정보를 더 제공해줬을 것이란 생각이다.
혹은 가장 쉽게 뮤지컬 장면의 횟수를 4회 이하로 줄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택한 감독의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레이디 가가’라는 가수로서의 존재가 영향을 줬으리라 짐작한다. 그녀는 뛰어난 배우임에는 분명하나 조커2에서 그녀는 노래할 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만큼 그녀는 위대한 가수면서 아티스트고 그런 모습을 담아낸 뮤지컬 장면에 공을 들인 감독이 편집에서 덜어내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장면을 통해서 나는 레이디 가가의 연기자적 매력이 반감되었다고 느꼈다. 그녀의 본업은 가수가 맞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으니까.
또 아서 플랙과 뮤지컬의 조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데에는 그의 삶 속에서 단 한번도 음악이 주요하게 다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커2에서는 그런 장치를 대사로서 전한다.
‘사건이 있었던 날,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라는 정신의의 질문에 ‘음악이요’라고 대답하고 ‘엄마와 난 머레이의 쇼에서 그 밴드 음악을 좋아했어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난 이것이 굉장히 빈약한 장치로 느껴졌다. 그는 조커로 각성하는 순간에 계단에서 즉흥 춤을 춘 것이 가장 음악과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해방감을 나타내는 몸짓으로서의 표현이었지 음악과 춤의 결합으로 아서에게 중요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물론 영상 편집에서 얹혀진 음악과는 매칭됐으나 이게 그에게 평생 내제되어있던 음악적 욕구가 뿜어져 나온것으로 느끼진 않았다)
유일한 뮤지컬 노래와의 연결점은 수감 생활 중 우연히 만난 할리와의 수업이 음악 수업이었고, 할리가 음악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즉, 사랑하게 된 여자의 삶을 따라 음악이 아서에게 온 것이다. 음악은 원래 아서에게 존재했던 세상이 아니다.
따지자면 노래 부르기를 즐겨하던 메인 간수가 더 음악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옥 내에 상영되는 영화가 초기 유성영화 중 뮤지컬 영화인 점과 그녀가 노래를 부르자 베테랑 뮤지컬 배우처럼 노래를 소화하는 아서플랙의 모습은 굉장히 쌩뚱맞은 연결이다.
갑자기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기쁨을 만끽하는 아서의 장면에서 촬영기간동안 노래와 춤 연습을 해낸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로서의 면모가 보였지 아서 플랙이 보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보니 아서에게 도피처가 된 할리와의 유대를 보여주는 장치로서 ‘뮤지컬’이 채택 것의 당위성 결여와 편집적인 단일함, 불균형으로 필요 이상의 관람의 불편함을 유발한 것이 조커2가 국제적인 혹평을 받는 이유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은 딱 그만큼의 단점으로만 작용해야 할 텐데 대부분의 비난자들을 객관적 수치보다 더욱 맹렬하게 비난하는 듯 하다. 점수로 치자면 1점만 깎아야할 지점들로 3점을 깎는 식이다.
물론 단점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추가로 두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현실성의 수준이 유지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극이 다루는 사건의 템포가 너무 느리다는 점이다.
현실성의 수준 유지는 나의 개인적인 감상 포인트인데,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영화든 극을 만드는 시선의 현실성이 존재한다. 예를들어 하이 판타지와 로우 판타지의 차이로 완전히 상상의 세계거나 현실적이면서 약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 또 다큐멘터리 처럼 현실적인 사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가는 등이 현실성의 수준이다. 어떤 영화든 각자의 현실성의 수준이 있는데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것이 나는 각 작품이 가지게 되는 색깔을 잘 담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중간에 현실성이 확 바뀌는 영화 기법들도 존재하나 그것은 그것대로의 연출 장치로서 작동해야하는 것이지 의미없이 이 수준이 들쭉 날쭉하다면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받아들이는 관람의 실마리를 해치게 된다. 마치 그랜드부타패스트 호텔을 볼때 판타지로서 받아들이기에 잔인한 살해장면이 나와도 동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순간적으로 정말 진지하게 살해장면으로 묘사된다면 일전에 있어왔던 장면들을 환상이었거나 일장춘몽이었다는 등 다시금 해석해야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가 조커2 후반부의 법원 폭파씬과 그의 추종자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데, 조커2는 뮤지컬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고담 시티부터 조커라는 인물까지 가상의 존재들이긴 하지만 다크나이트처럼 로우 판타지로 그려지지 않고 뉴욕에서 일어난 범죄를 조명하듯 그려진다. 수감 생활을 다큐멘터리 처럼 묘사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극 중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듯 아서 플랙의 조커 사건은 꽤 유명한 사건으로 비춰지고 그의 추종자들 또한 다수로 보인다. 그가 경찰차에 연행되어 법원으로 출두할 때 팬들에게 둘러쌓이는 장면등이 그렇다. 그러나 조커 1편의 엔딩 장면에서조차 폭력적이고 과행동으로 따랐던 그의 추종자들은 가면을 쓰고 그의 차를 따라가고, 법원에 구경꾼들로서 자리하고 있을 뿐 그 어떤 행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다 대뜸 법원이 폭파되는데, 이 테러의 주동자가 할리라고 생각하기에도 현실성이 없고 조커의 추종자들이 벌인 일이라기에도 아파서온 그들의 소극적인 모습과 연결성이 줄어든다.
심지어 폭파 후 법원에서 빠져나온 아서 플랙을 발견하고 그를 태워 도망가는 사람은 우연히 지나가던 조커 가면을 쓴 추종자고, 그들이 이 테러에 대해 아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테러가 일어났다는 뉴스만 묘사될 뿐 이후에 이 사건의 배후에 대한 묘사도 없다. 여기서 나는 영화 내내 이어온 현실성의 수준이 붕괴되었다고 느꼈다. 순간적으로 다크나이트적 모먼트가 나온것 아닌가? 누군가 설계했음이 분명한 대규모의 테러가 대뜸 일어난 것이다. 그런 영화 아니었잖아.
그리고 두번째로 극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사건은 아서 플랙의 재판결이 너무 반복적이고 느리다는 것이다. 실제 공판이 그렇듯 4-5차에 걸쳐 아서 플랙은 재판에 서고 휴정을 반복한다. 그럴때 마다 아캄 수용소와 도심 속 법원을 왔다갔다 하는 변화만 생기는데 이 반복성이 너무 루즈하다. 판결 하나하나가 뚜렷하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못하다. 그들의 소꿉장난을 굳이 묵인해주는 하나의 TV쇼 같다. 계속해서 재판장은 이것은 TV쇼가 아니다, 마지막 경고다 등을 말하지만 결코 이 재판은 실제의 재판처럼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제성과 더불어 실제로 이 재판을 실시간 방영한다는 쇼적인 설정이 더해졌기 때문인데 이마저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라 첫번째 문제에 한축을 더한다.
결과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 뮤지컬 뿐만 아니라 법원-감옥이라는 장소의 반복/ 재판에서의 스포트라이트와 감옥에서의 탄압 이라는 반복까지 이어지니 전체적은 극 중 요소에 의외성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법원 테러라는 거대한 사건이 하이라이트에 들어갔음에도 이는 조커의 주체적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힘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커의 결정적 선택은 ‘조커는 없어요’라며 힘없게 꼬리를 내리는 아서 플랙의 독백이고, 이로써 추종자들의 대의명분을 꺾어버리는 것이 할리가 떠나감과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촉발시킨 것이다.
분명 큰 변화이나 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첨예하게 부딪혀온 내적 고민이 아니라 극 후반에 조커라는 어색한 탈을 어설프게 연기하는 아서 플랙의 힘겨운 똥꼬쇼가 그의 예전 절친을 상처입힘으로 빠르게 현타를 불러와 촉발된 결정이라는 점에서 조커1 편에서 나온 감정적 폭발이 없었다는 점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보는 재미가 없는 영화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체급이 높은 영화임에 분명하다. 촬영과 조명이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 많고 시네마토그래픽 적으로 굉장히 완성도 높고 강렬한 장면이 많다.
기억에 남는 조커적 장면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중 속 아서 플랙이 자신의 고독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더욱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진 아서가 홀로 정지해있는 듯이 고독하게 자신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그의 배우적 카리스마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시선을 앗아가는 장면에서는 다른 어떤 씬보다 강하고 깊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는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