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로 미리의 발코니 창은 내내 갈색 버티컬로 한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거실엔 주광색 형광등을 켜지 못했고 홈쇼핑으로 사서 조립만 해놓고 쓰지 않던 대나무살 커버의 스탠드 등이 노랗게 구석을 밝히는 정도였다.
한 달 가까이 더 이상 밖을 보지 못하고 가슴만 벌렁거리며 체중이 빠져가던 미리는 결국 이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집을 내놓기 위해 부동산 중개 사무실에 갔다가 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도, 미리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로를 알아보았던 그 찰나의 순간이 미리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상황이었는지.
그건 절대로 로맨틱한 드라마 같은 순간은 아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미리가 비탈진 보도의 코너를 돌아서 부동산 중개 사무실 입구의 데크로 발을 디딜 때쯤 한 남자가 검은색의 기다란 소프트 백을 어깨에 메고 뒤따라오고 있었다.
남자는 사무실과 안면이 있었는지 그가 들어서자 사무실에 있던 두 명의 공인중개사 중 한 명이 오피스텔 이름을 말하며 반갑게 아는 체했고 다른 한 명의 중개사는 미리가 들어서자 아파트 이름을 말하며 오셨냐고 환영인사를 했다.
남자의 오피스텔은 그 구역에서 보기 드문 신축이었고 일본에서 건축 실무를 하던 업자가 실용적이고 고급지게 설계하고 시행했다고 플랫카드를 오랫동안 걸어놨던 터라 미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오피스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미리는 그날 부서진 카메라 망원렌즈를 수리하기 위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갔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입었던 빨간 브이넥 스웨터를 두껍게 퀼팅 된 롱 패딩 안에 입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남자 역시 망원경 가방이 틀림없는 검은 가방에 무엇보다 그날 쓰고 있었던 하얀 캡을 똑같이 뒤로 돌려서 쓰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망원렌즈에 잡힌 상대방들의 모습에서 빨간 스웨터와 하얀 캡은 어떻게 해도 혼동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한 여름도 아닌 가을에 하얀 캡이라니.
살짝만 봐도 눈에 띄는 채도 높은 빨간색 스웨터라니.
"다음에 다시 올게요"
누가 봐도 뭔가에 놀라듯 크게 당황한 미리는 말끝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뒤돌아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미리는 데크 아래로 내려와서 다섯 걸음도 떼지 못하고 맴돌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마음이 얼어붙으면서 발걸음까지 길바닥에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미리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남자가 매물사진이 덕지덕지 붙은 출입문을 밀고 나와 단호한 발걸음으로 미리에게 다가왔다.
잠깐 열린 사무실 문 너머로 중개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남녀의 순식간의 들고나감을 일어서서 보고 있었다.
그들도 잠깐은 어리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영문을 알기 위해 서두르지는 않았다.
중개할 매물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니어도, 당분간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매물이 되어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유리문 너머로 방금 나간 남녀를 보던 그들은 다시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저 아시는 거죠? 저는 알겠거든요.”
“맞죠.”
남자는 묻는 것도 아니고 안 묻는 것도 아닌 어조로 말을 건넸다.
“거기, 101동 1003호 갈색 버티컬이요.”
하얘졌던 미리의 머릿속이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도망가도 두 걸음도 못 가 넘어질 것 같은 생각과 함께 무슨 얘길 할지 들어봐야 할 참이었다.
미리의 손이 카메라 가방 끈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하얗게 변했다.
“저는 알바로 오피스텔 관리를 맡고 있어서 일 때문에 나온 건 데 그쪽은 왜 집을 내놓으셨어요? 아직 기간 남았다면서요.”
‘그걸 물어보고 나왔다고?’
미리가 입이 싼 부동산 중개사를 머릿속에서 탓하는 동안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 이후로 거실에 불이 켜진 걸 못 봤어요. 버티컬도 항상 닫혀 있고.”
남자는 잠시 텀을 두고 숨을 골랐다.
“저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뭔가 무서워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됐었거든요.”
창백해진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던 미리 곁에 서서 남자는 천천히 그러나 에두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들은 어둑한 교실을 가로질러 들어오던 광선검 같던 빛처럼 곧바르게 날아와 미리를 둘러싼 투명하고 완고한 껍질들을 좌슥슥 우슥슥 베어내고 있었다.
미리는 잠깐 동안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남자는 마른 몸매에 동그란 얼굴과 동그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달지 않은 둥근 카스텔라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어려 보인다는 생각을 순식간에 하며 미리는 순간 뜨끔해졌다.
‘어려 보인다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리의 얼굴에 옅은 분홍물에 씻긴 아찔함이 내려앉았다.
“사실 자주 그쪽을 봤었어요. 가끔 비슷한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바깥을 보는 거 같았으니까요. 저는 하늘을 보는데 그쪽은 뭘 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저를 본 것 같았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계속 보고 있었다는 말끝에 부끄러움이 조금 묻어있었다.
미리는 표면이 말라서 까슬까슬해진 카스텔라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는 것 같은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 까슬해진 목소리 덕분에 미리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조우찬입니다. 취미가 별 관찰인데 요즘 별 말고 누구를 자꾸 보게 되더라고요. 들키고 말았지만요. 흰 모자만 안 썼어도 무사할 수 있었을 텐데.”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들키고 싶었나 봐요.”
미리 역시 그날 입었던 빨간 스웨터를 무심히 입고 나왔던 걸 자책하고 있던 터라 우찬의 흰 모자 얘기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방금 웃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미리의 횡격막에 가벼운 경련이 시작되었고 딸꾹질이 나왔다.
우찬은 검은 가방 옆구리 주머니에서 종이팩에 든 생수를 꺼내어 뚜껑을 열고 미리에게 건네주었다.
십 분도 채 안 걸리는 시간이었다.
그 십 분의 상황들은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초 단위로 슬라이스 되어 빈틈없이 정렬된 채로 미리의 기억 속에 박제되고 있었다.
우찬이 보던 시간과 미리가 느낀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간 거라면 그 모든 상황들은 뒤틀리지 않고 우찬과 미리를 초 단위의 같은 시공간 프레임 안에 품고 있을 거였다.
십일월 셋째 주 토요일 빠른 오후 햇살이 맑고 밝았다.
커다란 고기압이 북서쪽에서 온다고 했던가.
조금 서늘했다.
중국발 미세먼지들이, 차갑고 무거워져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이동해 오는 고기압 덩어리를 뚫고 동진하지 못했는지 하늘이 파랬다.
보기 드문 진한 파란색이었다.
나이를 제법 먹은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지난겨울 끝자락에 가지가 뭉텅뭉텅 잘려나갔지만 봄엔 여지없이 가늘고 연한 가지들을 쑤욱 쑥 밀어 올렸었다.
새로 돋은 연한 가지들은 아주 잘잘한 은행잎만 내밀어서 여름엔 인색한 그늘로, 가을엔 셀 수 있을 만큼의 은행을 톡톡 떨어뜨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끝에 구린 내를 풍기며 소심하게 복수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 떨구고 남은 잎들도 많지 않았는데 큐티클 층이 벗겨진 색 바랜 은행잎 하나가 우찬의 흰 모자 조임새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칼 위로 후드득 떨어져 앉았다.
우주가 생겨나는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확률적 현상이라고 했다. 우주가 갑자기 요동쳐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시간도 공간도 없고 중력도 전자기력도 핵력도 구분이 안 되는 태초의 에너지로 가득 찬 시기는 얼마나 평안할까?
동시에 그 완벽함으로 인해 또 얼마나 불안정한가?
그날 망원렌즈를 통해 서로를 보았던 순간, 그 완벽하지만 불안정하던 미리의 시간은 끝났었다. 그리고 초단위로 슬라이스 된 아주 느린 시간들이 미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우찬의 머리에 내려앉은 작고 메마른 은행잎을 떼어냈다.
우찬의 머리 위에 떨어진 은행잎을 떼어낼 때 바라본 우찬의 눈동자에서 미리는 자신의 얼굴이 되비치다 사라지고 별이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우주가 폭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찬의 눈동자에서 동공은 점점 작아지고 이미 폭발해 버린 갈색 홍채는 더 밝은 빛을 내며 툭탁거리며 타오르는 듯했다. 미리는 그 밝은 갈색 빛살들이 우찬의 눈동자를 빠져나와 포대기처럼 미리를 온통 감싸고 우찬까지 휘어 감는 듯했다.
광선검처럼 짓쳐 들어오던 우찬의 말에 슥슥 베이고도 남아있던 미리를 뒤덮고 있던 나머지 껍질들, 투명하지만 완강하고 두껍던 두려움과 긴장감은 켜켜이 풀어져서 둘을 감싸고 있던 밝은 갈색의 포대기 위로 빠져나가 좁은 길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 야윈 가지들을 타고 파란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미리의 발목까지 차올랐다가 멀어지고 다시 차올랐다가 멀어졌다.
두려움자신을 감싸고 있던 두려움들이 사라지자 껍질을 잃어버린 연체동물처럼 무너지려는 미리의 온몸을 겨우 붙들어 세운 것이 발목으로 차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차올랐던 새로운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미리는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