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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강 Nov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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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의 시간(소설연재 5)

미리와 우찬은 매일 만났다.


미리가 아주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성실하게 다니던 직장일 외에는 사적인 시간에 사람들과의 만남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매일 만났다.      


저녁을 같이 먹고 차를 마시고 거리를 걷다 집으로 돌아가면 각자의 발코니와 창에서 망원렌즈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리의 집에서, 때로는 우찬의 오피스텔 옥상에서 미리의 카메라로 골목길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우찬의 망원경으로 좁은 하늘을 뒤져서 몇 개 안 되는 천체들을 올려다보기도 하였다.

우찬의 망원경 하나는 미리의 발코니로 옮겨졌고 우찬의 방에는 고사리 화분이 잔뜩 늘어났다.   

  

우찬은 서투르게나마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의 방에는 미하게 새끼 위성들을 줄줄이 달고 있거나 띠를 두른 모습의 행성들이나 태양의 흑점과 월면 사진들이 가득했지만 그 사이사이로 미리의 사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찬은 미리가 만들어내는 사소한 변화들을 좋아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를 원했다.      


미리가 초록색과 빨간색, 파란색이 교차로 짜인 패브릭 미니소파에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폴폴 올라오는 아주 작은 반짝거리는 먼지들, 노랗게 염색된 양털이 거칠게 섞여 짜인 담요에서 터럭들이 날아오르는 순간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 장난스럽게 미리를 안아서 앉히기도 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기도 하며 소동을 벌였고 끊임없이 웃기도 하고 토닥거리기도 하였다.     


미리는 그때 우찬에게 빠져있었다.

우찬 역시 미리에게 깊이 빠져있었던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때 그들은 서로 사랑했었다.    

 

우찬은 미리의 모든 것을, 미리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른 새벽 여명이 푸르스름한 냉기와 함께 스며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우찬은 여지없이 깨어 미리의 머리에서 나는 옅은 냄새를 킁킁대며 맡다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어서 조금 차가워진 미리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쓸며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미리의 팔뚝에선 작은 소름이 돋았다가 우찬의 따뜻한 손길이 닿으며 조용히 가라앉았고 대신 너무 가늘어서 도저히 털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은 솜털들이 부스스하게 일어나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새벽빛에 빛나며 가늘게 떨리는 것을 숨죽여 바라보곤 했다.    

  

우찬이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따뜻한 미리의 몸을 가만히 껴안으면 차가워진 우찬의 몸 때문에 미리가 내던 가느다란 고양이울음소리 같은 작은 신음소리를 너무 좋아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백번쯤 그 소리를 내달라고 조른 적도 있었다.


일요일 아침 햇살 아래 미리의 얇은 눈꺼풀 아래로 미세한 푸른 정맥이 되비치는 것 마저 신비하고 아름답다며 카메라를 들이밀어 프레시를 터뜨려 늦은 잠에 혼곤히 자고 있던 미리를 깨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로는 이불 밖으로 나온 발뒤꿈치에서 종아리를 향하여 쭉 뻗어 올라가던 아킬레스건의 예리함을 감탄하며 흥얼거렸고, 때로는 귓바퀴 뒤에 난 작은 점의 하찮음을 어루만졌고, 때로는 숨결을 따라 배꼽의 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순간을 소중해하며 엎드려 한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미리의 배꼽으로 가져가면서 우찬은 가끔 외치곤 했다.

“블랙홀이다. 블랙홀이야. 빨려 들어가고 있어. 여기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어.”

“미리 은하의 중심 블랙홀이야. 이제 이 경계만 넘으면 난 사라지고 말 거야. 아주 빠른 속도로 도망치지 않으면 되돌아올 수 없어. 이제 조우찬은 사라지는 거야. 아아악! 빨려 들어간다. 빠아 알려 어... 꼬르륵.”

그렇게 외치며 우찬은 미리의 배꼽 위로, 배 위로, 넓게 퍼져 평평해진 미리의 마른 가슴 위로 쓰러져 들어오곤 했다.    

  

미리는 우찬에게 블랙홀이었다.


우찬의 몸도 마음도 미친 듯한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작지만 저항할 수 없는 블랙홀이었다.    

  

우찬은 그 모든 시간이 아까워서 아예 집을 합치고 싶어 했지만 몇 가지 면에서 미리는 언제나 단호했다.


미리의 단호함은 주로 우찬이 미리의 가족들을 궁금해할 때, 미리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할 때, 또는 성급하게 결혼이나 아이들과 같은 과거나 미래지향적인 것을 슬그머니 꺼낼 때 여지없이 드러났다.


미리의 단호함은 칼 같은 차단이라기보다는 아주 완곡하지만 동시에 완강한 거부였다.    

 

가족, 어린 시절, 결혼, 아이와 같은 단어와 따듯함, 포근함, 아련한 달콤함과 시큼함이 함께 어우러져 미리 앞에 펼쳐지다가는 미리의 표정에서 뚝뚝 떨어지는 서늘함에 다 흩어지다 풀어지고 얼어붙어 미리와 우찬의 발등으로 부서져 내리곤 했다.


미리는 그렇게 발등에, 발아래 쌓인 단어들의 폐허를 조용히 밟으며 우찬으로부터 발걸음을 떼어 한두 걸음 이상 멀어지기 일쑤였다.     


우찬은 서운한 표정을 못내 감추지 못했지만 미리에게 숨겨진 정보요원이 아니냐고 놀리는 걸로 상황을 전환하기 바빴다.


손만 스쳐도 부서질 것 같은 미리에겐 턱도 없는 농담인 줄 알면서도 차라리 그게 진짜면 좋겠다는 뭔가 모를 바람이 우찬의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미리가 파리해진 얼굴로 밟고 지나가며 부서진 그 단어들의 파편은 우찬과 미리의 가슴속에서 똑같이 서걱서걱 얼어서 쌓였다가 녹았고 또다시 쌓였다가 녹는 일이 차츰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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