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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강 Nov 26. 2024

한 호흡

미리(우찬)의 시간(소설연재 6)

우찬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 겸 연구원 인턴을 앞두고 있었다.



우찬이 처음부터 박사과정까지 염두에 두고 석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에 박사과정으로 진로를 결정하자 틈만 나면 교수들 흉보기에 열을 올렸던 동기들 중 하나가 ‘우웩~’하며 토를 하는 시늉을 했었다.


과정 내내 전담교수가 따오는 프로젝트들 때문에 숨 쉴 틈 없이 몰아쳐 왔기에 이걸 계속하느니 그냥 어지간한 공사에나 입사해서 워라밸이나 즐기겠다는 동기들이 더 많았었다.



아주 단단하게 목표를 정한 것이 아니라면 다들 뜯어말리는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 한 학기 정도 잠깐 숨이나 쉬자며 놀고 있던 동안 우찬은 전공 지도 교수의 끈질긴 도움 요청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그저 머리를 비우는 데 집중했다.



캐나다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다가 돌아와 시작한 것은 학부시절 천문관측 동아리 활동에 슬금슬금 끼어들기였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혼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별이나 보며 멍 때리는 게 최선의 휴식이었다.



우찬은 일 년 전부터 막내 삼촌이 건축한 8층짜리 꼬마빌딩 꼭대기 층 오피스텔에 묵으며 관리실에 접수된 이런저런 내용들을 검토해서 삼촌이나 시설 관련 업자들에게 연결하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서 하고 있었다.


신축이라 별 다른 일이 거의 없었지만 무료로 오피스텔을 사용하게 된 우찬의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는 삼촌의 배려라는 걸 우찬은 알고 있었다.


우찬은 침실 창 쪽에 무거운 철제 책상을 구해 놓고 그 위에 250mm 돕소니안 반사 망원경을 두었었다.

별을 보는 용도가 아니라 그저 망원경을 보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던 우찬은 그걸 알루미늄 컨테이너에 곱게 담아버렸다.

이제 그건 우찬과 함께 산으로 바닷가로 함께 돌아다닐 동반자 역할을 할 거였다.


대신 부랴부랴 굴절망원경을 하나 사서 루프 탑에서 혹은 거실 창가에서 흐린 하늘을 뒤지며 뭐라도 들여다보기 시작했었다.


굴절망원경은 구경이 작아서 가대를 쓰더라도 다루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일이층 정도 수시로 들고 오르락내리락하기 편했고 중국산 저가 제품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구하는게 일도 아니었다.

로켓프레쉬로 배달 안되는게 이상할 정도였다.



다섯 학기 한 학기 내내 논문과 씨름하느라 욕지기가 나올 만큼 지쳤던지라 캐나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어도 소진되어 버린 것 같았던 영혼 한 귀퉁이를 다시 찾아와 불씨를 살려야 할 때였다.

 더 퍽퍽한 시간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면역력이 필요한 법이므로.



인구가 천만 명에 육박하는 도시의 하늘은 별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사실상 SF 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뚜껑 덮인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큰 도시열돔을 덮어쓰고 있기 마련이다.



열돔은 계절과 무관하게 견고하게 도시를 뒤덮고 있어서 도시의 열기와 먼지는 웬만해서는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여름엔 시원하기 어렵고 겨울에도 시베리아 고기압이 사나운 이빨로 열돔을 할퀴고 찢어 들어와 도시를 꽁꽁 얼리기 전에는 늘 어른거리는 열기가 하늘로 향하는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도심의 밤하늘은 열돔 밖의 별을 죄다 돔 안의 지상으로 쏟아버린 것인지 하늘에 남은 천체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우찬은 그래도 멀리 보이는 저녁달을 서쪽 하늘에서 동쪽 하늘로 훑어가며 쫓아다녔고, 달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다니는 행성들을 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때로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저물어가는 달을 잡으려 망원경을 들이댄 적도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잡힌 피사체가 미리였다.



아파트는 거대한 성체처럼 시야를 막고 있었는데 칸칸이 구획 지어진 창들의 오와 열은 사실 길가의 가로수보다 더 특별하지 않은 매력 없는 대상이어서 한 번도 망원렌즈에 포착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한 곳 발코니 버티컬 좁은 틈 사이로 삼각대에 올려진 카메라가 보였고 그 카메라 뒤로 사람이 보였다.



우찬은 처음에 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번째 보았 짧은 머리의 여자라는 걸 긴 치마를 보고 알게 되었다.


두 번째부턴 우찬이 부러 찾아봤던 게 사실이었다.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장착했지만 그게 상향각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하향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린놈이 무슨 속셈으로, 도대체 뭘 훔쳐보나 싶은 마음이었고 저걸 찾아내서 혼내줘야 하나 어쩌나.

부모들은 알고나 있는 건가? 하는 약간의 힐난 섞인 마음으로 봤었던 거였다.



그러다 틀림없이 여자라는 생각이 든 후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찾아보게 되었다.


때로는 평일 낮에도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아파트에선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의 동태는 없었다.



‘저 여자 뭐지? 뭘 보는 거지?’



나쁜 습관을 가진 여자로 캐릭터 설정을 하자 사실 우찬은 조금 흥분되기도 하였다.


우찬은 처음 미리를 본 후로 한 달 가까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망원경을 달이나 행성들 대신 그녀가 있는 아파트 쪽에 고정시켰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을 발견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왔었다.

긴 그림자를 물고 해가 그녀의 아파트 뒤로 넘어가는 때였다.

우찬이 사는 빌딩은 외벽의 색깔이 밝아서 노을이 닿으면 주위의 그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나는 건물이었다.



우찬은 그날도 약간 들뜬 마음으로 무심코 여름 한 달 캐나다를 누비며 쓰고 다니다 구석에 던져 놓았던 흰 캡을 뒤집어쓰고 망원경으로 초점을 맞춰보고 있었다.

그리고 초점이 맞춰져 선명해진 시야로 그녀를 보았다.



'아. 보이네. 보이네.'



우찬의 심장이 갑자기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그녀가 카메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자신인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쩌릿함이 뒷골을 타고 척추 끝 꼬리뼈까지 흘러 내려가는 것 같았다.


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망원경을 놓고 일어났지만 시선은 그녀가 있을 그곳에 못 박힌 것 같았다.


 

‘들켰나?’



그동안 그녀를 훔쳐보았던 것은 들켜서는 안 되는 '짓거리'임에 틀림없었기에 우찬은 얼굴도 마음도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우찬은 한 오라기 희망을 갖고 들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 망원경 아이피스에 오른쪽 눈을 갖다 대었다.


그녀의 발코니에 남아있던 좁은 틈이 어느새 어두운 버티컬로 꽁꽁 닫혀있었다.



‘들켰네.’



그녀 역시 우찬처럼 당황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찬은 그 이후로 서로가 서로에게 들키기를 바라며 더 자주 그녀의 아파트를 바라보았지만 버티컬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진한 갈색이거나 군청색인 것 같은 발코니의 버티컬이 열리기는커녕 밤에도 거실의 불빛이 환하지 않았다.


흐리고 노란 조명이 조금 흘러나와서 여전히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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