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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강 Dec 01. 2024

중력붕괴

미리(우찬)의 시간(소설연재 7)

일반적으로 무엇엔가 집중하고 빠지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면 그는 아주 신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시간에 실체가 있다면 어쩌면 두 개체 혹은 그 이상의 개체들 사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속도의 한 팩터일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에 따르면 우찬은 그런 면에서 언제나 신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찬의 삶에서 미리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그런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신중하다'는  표현은 다르게 정의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지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충고 따위는 힘을 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신성아파트 101동 1003호의 발코니에 있던 삼각대 위의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와 그 너머의 짧은 머리를 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와 우찬의 공간은 실제 직선거리로는 삼백에서 사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기까지 그 물리적인 거리는 공고했었다.


우찬이 완만한 속도로 상상해 왔던, 짧은 머리의 불순할 게 틀림없는 취미를 가진 그녀와의 조우는 갑작스러운 충돌로 인해 상상불가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었다.


사실 혜성의 찌꺼기나 소행성이 충돌한다고 해도 예견이 안 되는 돌발사고일 수는 없다.


공연히 흰 모자를 뒤집어쓴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찬과 그녀가 망원렌즈를 통해 서로를  동시에 알아봤다는 것은 거의 교통사고와 같은 충돌임에 틀림없었다.


그 후 아무것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 그 발코니로 인해 우찬과 그녀 사이의 물리적 속도는 제로였다.


제로 말고 또 어떤 값을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우찬의 심리적 거리는 이미 우찬의 마음 안에서 마음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찬은 이미 그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우찬은 미해결의 값을 지닌 시간 안에서 한 달 내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모른 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찬은 조금은 민망해하며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뇨. 전 그녀를 알고 있어요.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랬다.


우찬은 이주가 넘게 그녀의 발코니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살고 있던 신성아파트 101동 주변을 맴돈 적이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비탈길에 지어진 101동은 두 개 지층에 상가들이 있어서 주민들이 우스개로 칭하길 주상복합 형태였다.


우찬은 상가 앞 도로를 따라 101동을 한 바퀴쯤 돌고는 생수를 사서 두 바퀴 째 돌다 거주민용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출입구 쪽에 있는 우편함 뚜껑을 젖히고 손을 넣어 더듬으며 우편물을 하나 찾아내 들고 나오는 여자를 보았다.


머리가 짧고 마른 여자였다.


출입구 양쪽으로는 피아노 학원과 어린이집이 있었고 우찬은 얼른 어린이집 쪽으로 걸어갔다.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세 평 남짓의 텃밭과 꽃밭 사이로 난 어린이집 출입로로 자연스럽게 들어서던 우찬의 머릿속은 하얗고 가는 손이 드나든 우편함 번호가 분명히 1003호라는 걸 되짚고 있었다.


그녀는 우찬의 생각보다 키가 조금 커 보이고 훨씬 더 말라 보였다.


처음 볼 때 중학생 남학생쯤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어린이집 앞을 지나가는 창백하고 무표정한 그녀에게서 한 줄기 향이 실오라기 나풀거리듯 나부끼다 우찬의 코끝을 휘감고 지나갔다.


곱슬기가 살짝 있는 짧은 뒷머리는 사방으로 삐죽 대고 있었다.


옅은 카키색 카고 바지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데님을 겉옷으로 입고 플랫슈즈를 신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우찬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옆 동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도 우찬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할머니 한 분이 어린이집으로 손녀를 데리러 오신 건지 우찬이 있던 텃밭과 꽃밭 사이에 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찬을 둘러싼 시공간은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향해 붕괴해 들어가는 것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우찬에게 작용하는 중력의 중심은 명백하게 바로 그녀라는 걸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서려는 그녀를 막 보고 뒤따라 들어가던 날.


우찬은 인정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흰 캡을 뒤집어쓰고 적당한 길이의 검은 망원경 가방을 메고 뒤 따라 들어간 우찬을 보고 당황하며 부동산 사무실을 황급하게 빠져나갔다.


오피스텔 호실 하나가 나갈 때가 되어 들른 것이기도 했지만 카메라가방을 멘 짧은 머리의 그녀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따라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가 계약기간도 채 안 끝난 집을 임대매물로 내놓으러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뒤따라 나갔던 것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길 위에 서서 맴돌고 있던 그녀에게 서둘러 곧바로 다가가 에두르지 않고 아는 척했던 것은.


달이 지구 주위를, 지구가 태양 주위를, 태양이 자신이 속한 은하의 나선 팔에서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휘감으며 돌고 있는 것은 자신들을 집어삼키듯 끌어당기는 중력에 의한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또 너무 빠르게 돌다가는 튕겨져서 영영 멀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을 방지하는 최적의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 그런 움직임 처럼.


그건 순전히 우찬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무엇보다 많이 당황한 것 같은 그녀를 안정시켜줘야 한다는 급박함 때문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초가을 햇살이 은행잎들과 함께 그녀의 어깨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찬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그녀를 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우찬이 흰 모자 때문에 들켰다고 해서였는지 아니면 들키고 싶었나 보다고 스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했을 때였는지 문득 슬쩍 웃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바로 딸꾹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찬은 메고 나온 망원경가방에서 팩에 담긴 생수를 꺼내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넸다.


생수를 받아 드는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떨고 있었다.


은행잎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그중 한 개가 모자 조이개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칼 위로 떨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다가왔다.


아니 그녀의 팔이, 그녀의 손이 다가와 머리칼 위에 놓인 은행잎을 떼어냈다.


우찬은 또다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이상한 안도감이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딸꾹질이 멈추진 않았지만 얼굴엔 담홍색 단풍잎을 빠져나온 햇살이 번져있었다.


우찬은 부동산중개사무소 옆에, 옆에 자리 잡은 카페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따뜻한 걸 좀 마시게요. 잠깐만 편히 앉으시기도 하고요.”



우찬은 그녀의 어깨에 걸린 카메라 가방 끈을 살짝 잡아당겼다.



“주세요. 무거워 보여요.”



그녀가 잠시 움찔했지만 순순하게 카메라 가방을 벗어 우찬에게 넘겨주었다.


우찬은 그녀의 카메라 가방을 넘겨받아 자신의 망원경 가방을 멘 오른쪽 어깨에 겹쳐 메었다.


왼쪽 팔을 비워놔야 혹시 그녀가 비틀거리거나 계단을 올라갈 때 붙잡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어깨가 묵직해졌지만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우찬의 온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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