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관과 깨끗한 자연이 있는 어느 작은 산골 마을. 엔터기획사에서 보조금을 노린 글램핑장 개발을 시도하면서 도시에서 온 외부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부딪히게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결한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복잡하고 은유적인 의미들이 겹겹이 쌓인 영화다.
영화는 크게 2막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기준점은 엔터기획사 직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가 마을을 방문하는 두 번의 순간이다. 1막의 첫 방문은 글램핑장 설명회 참석 시점이다. 영화는 그 이전까지 타쿠미를 중심으로 산골 마을의 일상을 잔잔하게 비춘다.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아주 균형 잡힌 하나의 생태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등장은 그 균형을 깨뜨린다. 그들이 들고 온 글램핑장 개발 계획은 마을 생태계를 파괴할 위험이 가득하다.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보조금과 수익을 위해 생태계에 대한 존중 없이 개발을 밀어붙이려는 외부인들. 영화의 제목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떠오른다. 이 순간에서 악이 너무나도 명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가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 지어 놓는 것처럼 보인다.
설명회 이후 마을 주민들의 거부에 부딪힌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마치 추방당하듯 마을을 떠난다. 그렇게 악처럼 그려졌던 이들이 도시로 돌아가면, 그곳에서는 또다시 반대의 위치가 된다. 두 사람 모두 결국 거대한 구조 속 말단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내몬 기획사 사장이나 건설사 쪽 관계자를 ‘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섣불리 악이라 부르기엔, 그 뒤에는 너무나 복잡한 인과관계와 구조가 있다. 그렇게 선과 악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2막은 두 사람이 타쿠미를 글램핑장 관리인으로 섭외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1막에서 관객이 타쿠미를 앞장 세워 영화를 따라갔다면, 2막은 입장이 뒤집힌다. 관객은 이제 1막에서 완전한 타자였던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뒤를 쫓아가게 된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본 타쿠미는 사뭇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슴은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슴과 글램핑장 손님들이 절대 공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발언을 내뱉으며 자연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타쿠미의 고집스러운 태도는 과연 그가 중시하던 ‘균형’에 부합할까? ‘선’처럼 느껴졌던 마을 주민 타쿠미의 모습 역시 흐릿해진다.
2막의 전개는 타쿠미의 딸, 하나의 실종으로 급변한다. 그저 토론의 대상과 도구로만 여겨졌던 자연이 불현듯 인간을 삼켜버린다. 마치 웅크리고 있던 발톱을 드러내듯이. 여느 때와 같이 저물던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잔인하게 느껴진다. 영화 내내 카메라 뒤에서 모든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했던 자연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치 하찮다는 듯 인간을 내려다본다. 이제야 비로소 자연의 존재가 공포로 다가온다.
하나의 실종으로 인해 드러난 자연의 존재 앞에서 외부인인 타카하시, 마유즈미는 각각 다른 선택을 내린다. 마유즈미는 타쿠미의 집에 남음으로써 자연에 맞서지 않고 인간의 영역에 머무르길 선택하지만, 타카하시는 끝내 그 선을 넘기를 선택한다. 타카하시의 선택에는 알량한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낙원이 바로 자연에 있다는 믿음.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얄팍한 희망.
결국 사건은 일어나고야 만다.
하나의 죽음, 그리고 타쿠미의 타카하시 살해. (물론 두 사람 모두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결말을 다시 곱씹어봤다. 자연의 시선에서 과연 하나, 타쿠미, 타카하시가 뭐가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방식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 사람 모두 자연에 기생해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는 외부인이다. 수십 개의 물통을 들고 와 물을 퍼가고 나무를 잘라대는 인간과, 정화조 오염수를 배출하는 인간.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것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일까? 세 사람이 처한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는 총을 빗맞은 사슴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선을 어겼고, 타쿠미는 사슴이 인간을 해하지 않는다는 과신을 했고, 타카하시는 자신이 자연에 쉽게 속할 수 있는 알량한 자신감을 가졌다.
그렇다면, 타쿠미는 왜 타카하시를 살해하려 했을까. 총 맞은 사슴에 가까이 가서 공격을 당한 하나, 자연의 섭리에 개입해 하나를 구하려던 타카하시. 타쿠미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자연의 균형은 이미 깨져버린 상황이다. 어쩌면 자연을 맹신하는 인물인 타쿠미는 균형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결단을 내린 걸 지도 모른다. 그것은 속죄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맹신의 발현이었을까.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그의 선택은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글램핑 설명회에서 언급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라는 논리 안에서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악의 구조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고인다. 그리고 그 물들은 결국 어디론가 흐르고 고여서 모일 것이다. 마치 이들을 둘러싼 거대한 호수처럼. 타카하시를 살해한 타쿠미, 타쿠미의 딸 하나를 공격한 사슴, 사슴을 공격한 정체미상의 총격. 모든 일들이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일어나지 않았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비논리적인 상류 기획사의 지시를 받아 다시 비논리적인 가해를 하류 마을 주민들에게 입힌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타쿠미는 자신의 행동이 매우 비논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악의 연쇄 고리를 단절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꺼이 자신이 악이 되더라도 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대로 악이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인트로와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 인상 깊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숲길을 달리는 인물의 숨소리. 그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약해진다. 인물은 누구였을까. 과연 그는 이 끝없어 보이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저 살아남는 것조차 벅차 보이는, 작고 위태로운 숨소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