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있는 여자 리뷰 #장혜진 #별빛들
소설집 <스스로 있는 여자>는 설, 먹이, 멀리서 온 거짓말 총 3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설
설에게 신은 살며 느끼는 모든 것들이었다.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 솔잎을 갉아먹는 벌레, 가는 길을 멈춰서 쉬는 노인의 숨, 사람을 해하고자 하는 못된 마음. 원수를 용서하는 마음, 해가 뜨고 지는 일, 심지어 가장 더러운 변소에도 모든 것에 신이 있었다.
신은 정말 존재할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늘 신의 존재를 당연하게 배우고 받아들여 왔지만, 여전히 이 질문은 내게 궁금한 것이다. 진짜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워야 하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내가 살아온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었으니. 종교에 회의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였다. 사람들은 신을 왜,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신의 존재 자체보다 신을 믿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더 중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스스로 있는 여자>의 첫 번째 단편 <설>에는 기꺼이 스스로 만신이 된 ‘설’이 있다. 설은 늘 신과 가까이에 있었다. 할멈을 신으로 모시는 무녀에게 거둬져 신과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에게서 자랐고, 비범한 기운으로 신을 접했다. 세상이 바뀌고 천주교가 조선 땅에 들어오자 신부의 옆에서 천주 신을 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설은 신을 모시는 이들이 정작 고통 속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게 된다. 그동안 신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 신이 정말 있다면 왜 이들을 지키지 않는 걸까. 왜 이토록 냉정하고 잔인할 정도로 침묵하는가.
신의 뜻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설의 가장 깊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사실이었다.
설은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어디에도 신은 없으며, 오히려 세상이 신을 만들었다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 스스로.
할멈, 신령, 용왕, 천주 등 수많은 신들의 이름이 이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바라는 이유는 바로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에. 사람은 어딘가에 기대고, 바라고, 구원받고 싶어 하니까. 때로는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도 하고. 소설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에도, 솔잎을 갉아먹는 벌레에도 신이 깃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신이 될 수 있다면. 서로를 위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신의 이름 하나쯤은 더 더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신을 불러낸 설처럼.
비록 지금의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미미하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금 믿음을 품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난다.
2. 먹이
재채기처럼 여자는 참을 수 없이 외로웠고, 스스로 외로움이 되지 않기 위해 평생을 누군가에게 기생해 살았다.
돌이켜 보면 사랑이 공평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늘 먹고 먹히는 관계가 있었다. 자꾸만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자연스럽게 차올랐다. 홀로 두 발 딛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힘들고 외로우니까. 나 자신만으로는 내가 너무 나약한 것만 같아서. 무서워서. 그렇게 사랑은 방패가 된다. 그리고 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태초의 나와 마주하게 된다.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에게 기생하며 자라났으니.
<스스로 있는 여자>의 두 번째 단편 <먹이>는 사랑을 먹고 먹히는 관계로 풀어낸다. 소설 속 여자는 이기적인 존재다.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비어있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완벽한 숙주를 찾아다닌다. 태어날 때부터 숙주인 모체의 숨통을 끊고 스스로 나왔으니 누군가는 여자를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여자는 계속해서 숙주를 찾아다닌다. 양어머니부터 학창 시절 또래 친구, 어린 여자, 늙은 남자 가릴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신에게 기꺼이 먹히는 존재를. 마치 동물들의 약육강식 세계처럼, 여자는 원초적인 본능으로 먹이를 탐한다. 그 관계에는 본능과 욕망, 결핍과 지배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끝없이 기생을 이어가던 여자가 자신의 몸에 기생하고 먹히는 생명을 품고 변화하게 된다. 이제는 그녀의 몸이 숙주가 된다. 자신의 몸을 매개로,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파괴되는 감각을 느낀다.
여자는 이제껏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고 매운맛의 김치찌개, 양푼 가득 비볐던 윤기 흐르는 잡채, 참기름 향이 솔솔 나는 따끈따끈한 김밥, 비 오는 날이면 바싹하게 구워주던 부추전, 서둘러 수제비 반죽을 떼던 손, 조물조물 밥을 뭉쳐 입에 넣어주던 양어머니의 손가락. 어디까지가 양어머니이고 어디까지가 음식인지 여자는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양어머니를 잘랐다.
임신하고 가장 맛있는 것을 찾아 양어머니에게 온 장면을 보며, 여자의 먹는 행위가 사랑의 완성처럼 느껴졌다. 먹음으로써 모든 기억을 삼키고, 사랑을 체화하며,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감각. 먹음으로써 영원히 남게 되는 사랑.
사람은 먹어야 산다. 사람은 먹어야 자라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먹고 먹히며 서로에게 기대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여자는 자신이 살고 자라난 것처럼, 자신에게서 나온 생명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것이다. 기꺼이 숙주가 되어줄 것이다.
3. 멀리서 온 거짓말
너는 그 방학들 동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자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자 나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소설을 읽고는 우리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집에서 함께 살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내게 많은 사랑을 주셨던 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우리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진 뒤부터 교회에 잘 나가지 못하셨다. 교회는 할머니 삶에서 거의 전부에 가까운 존재였기에 그 현실이 얼마나 큰 상실이었을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9-10살 즈음부터 할머니는 매주 내게 교회 주보 가져오는 일을 시키셨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 (어쩌면 그보다 여러 번이었을지도) 그 부탁을 까먹었었다. 나는 그날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의 분노를 마주했다. 늘 다정했던 할머니가 불같이 화내는 모습은 낯설고 무서웠다. 그리고 그 종이 한번 안 가져왔다고 나에게 그토록 화를 내는 할머니를 당시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 내가 주보 가져오는 일을 도맡게 되어서. 나도 막 짜증을 냈다. 계속해서 뾰로통해있는 내게 손수 바른 조기를 건네며 먼저 화해의 손길을 건넸던 할머니지만, 그 이후로도 며칠을 계속 뚱하게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때가 아마 나와 할머니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이상하게 그때의 기억만이 유독 또렷하게 떠오른다. 혹시 그때 내 행동이 겨우 붙잡고 있던 할머니의 마음을 무너트리진 않았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다. 누군가와 이별하게 되면, 내가 상처 줬던 순간들이 더 진하게 되돌아오는 것 같다. 특히 그 시절, 어린 나와 할머니 모두에게 이 집이라는 공간이 전부였던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또 무지에서 비롯했던 이기심과 미숙함이 얼마나 날카로웠을지. 그 어린아이였던 손녀는 자라난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릴 때 이런 생각들을 한다.
문득 저 먼 별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너무 멀리 있어 그것이 지금 어떤 모습일지는 한참 뒤에나 알 수 있을 그런 별. 아직도 그 자리에 있기는 하는지. 별이 폭발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지구에서는 알 수 없이 먼 별.
소설의 힘을 빌려 나도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가본다. 더운 여름 거동이 불편하신 데도 우리 마루치에게 선풍기 바람을 쐬어줄 만큼 사랑이 많았던 할머니, 매일 아침 나와 동생 손을 꼭 잡고 기도해 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홀로 집안을 책임지시지 않아도 됐을 할머니, 일곱 남매를 낳기 전 곱디고왔을 우리 할머니를. 소설을 읽다 보니 그 먼 별에 묻혀있던 내 기억들과 감정들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린다.
세 단편의 여자들에게서 일부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리뷰라고 써놓고 내 얘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은 것 같아 약간 머쓱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개인의 경험과 생각이 공유되는 글을 접한 것이 얼마나 귀한지. 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 있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인과 ‘함께’하는 경험과 연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서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와 마주하고, 기대고, 때로는 상처받고 치유받으며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끌어내주신 작가님께 전합니다.
사…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