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Sicilia)로
우리는 5일간의 나폴리 일정을 마치고 오전 9시 55분 발 카타니아(Catania) 행 IC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나폴리역으로 향한다. 플랫폼에서 열차 쪽으로 짐을 끌고 가는데 단정한 정장 차림의 70대 노인 한 사람이 깍듯이 인사를 하며 다가오더니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우리 짐을 받아 챈다. 내키지 않아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따라가는 수밖에. 우리 좌석까지 짐을 끌고 오더니 역시 손을 내민다. 2유로를 줬더니 짐이 두 개이니 2유로를 더 내란다. 떠나는 순간까지 과연 나폴리답구나!
열차는 6인이 들어가는 칸막이 차(Compartment)인데 요즈음도 이런 열차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 칸에는 우리 부부와 사람 좋아 보이는 작달막한 키의 필리포(Philipo)라는 50대 남자뿐이다. 로마에 사는 필리포는 고향의 어머니 병문안 가는 길이란다. 영어와 짧은 이탈리아어를 썩어가며 필리포와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남부 사람답게 참 순박하고 메너도 좋다. 티레니아 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 기찻길은 정말 멋있다.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자그마한 바닷가 마을 비치에는 작은 파라솔 아래 일광욕하는 사람과 낚싯대 드리운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참 오랜만에 보는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오늘따라 맑은 하늘 아래 티레니아 해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푸른 바다가 눈이 시리다. 당장에라도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낮 기차를 탄 것은 정말 잘한 일 같다. 밤차를 타면 이런 멋진 경치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3시간쯤 후에는 필리포도 내리고 열차 칸에 달랑 우리 둘뿐이다. 우리는 온갖 편한 자세로 넓은 기차 칸을 독차지한 채 차창 밖 구경도 하고 책도 읽고 점심도 먹는다. 열흘 정도 정신없이 돌아다녔는데 오랜만에 가장 달콤한 휴식을 즐기는 셈이다.
오후 3시쯤에 기차는 빌라 산 조반니(Villa San Giovannni)라는 역에 멈춘다. 메시나 해협에 거의 다 왔나 보다. 기차는 빌라 산 조반니 역에서 꽤 뜸을 들인다. 객차가 몇 차례 왔다 갔다 움직이더니 서서히 고래뱃속 같은 페리 안으로 우리를 그대로 태운 채 들어가지 않는가? 우리는 처음 보는 광경에 마냥 신기해서 기차가 움직이는 상황을 열심히 지켜본다. 2~3칸 정도로 나누인 객차가 페리 안으로 유도되는데 카타니아행, 팔레르모행이 따로 나누어져 실린다.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우리는 고래 배속에서 배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고래 배속은 어두 컴컴하고 역시 답답하다. 짐은 그대로 둔 채 객차를 나와 페리 갑판으로 올라가니 배는 이미 메시나 해협을 가로지르고 있다. 양안(兩岸)이 다 가깝게 눈에 들어오고 예부터 거센 조류로 악명 높은 메시나 해협의 물살이 눈 아래로 보인다. 이오니아(Ionia)해와 티레니아(Tyrrhenia)해를 잇는 해협.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를 잇는 해협.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무대이기도 한 해협의 최단 거리는 불과 3km밖에 안 된다. 거센 조류만 아니라면 헤엄쳐서도 건널 수 있는 거리이다. 항해 시간은 30분도 채 안 되는 듯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벌써 페리는 메시나(Messina)에 와닿는다.
우리가 시칠리아로 간다고 말했을 때 큰 아들은 놀라는 표정을 하며 ‘아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라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거기 괜찮아? 위험할 텐데.’ 다들 그런 표정이었다. 시칠리아= 마피아= 위험 하나같이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오랫동안 벼뤄오던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는 시칠리아이다. 내가 언제부터 시칠리아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괴테는 ‘바다 건너 요괴가 나를 유혹한다’라며 바다를 건넜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에 홀린 것일까? 시칠리아의 오랜 역사와 다양한 복합 문화? 아름답기로 유명한 소문난 풍광? 아니면 시칠리아 기질로 유명한 시칠리아 사람들(Sicilians)? 제주도 면적의 13.5배, 남한 면적의 1/4배, 오랫동안 책으로 영화로 음악으로 접해 본 이탈리아에는 언제나 시칠리아가 있었다. 시칠리아는 지정학적으로는 이탈리아반도의 축구화 발끝에 놓인 축구공처럼 주변 여러 나라에 뺏고 뺏기는 변방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긴 역사 속에서는 결코 변방에 머물지 않았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괴테는 이렇게 썼다. ‘시칠리아 없는 이탈리아란 우리들 마음속에 아무런 심상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시칠리아야말로 모든 것을 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루이지 바르지니(Luigi Barzini)도 그의 책 <이탈리아인(The Italian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 이탈리아가 과연 어떤 곳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고 괴테가 말했는데 이것은 과연 옳은 말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입문자를 위한 모델 교실이며 거기에는 이탈리아식 특질이나 결점이 모조리 확대되고 강화되며 극채색으로 물들어 있다.’
메시나 해협을 건넌 열차는 메시나역에서 잠시 다시 뜸을 들인 후 우리를 그대로 태운 채 카타니아(Catania)로 향한다. 이제는 티레니아 해가 아닌 이오니 해의 파노라마가 해안을 따라 눈부시게 펼쳐진다. 본토와는 전혀 다른 남국적 정취가 물씬하다. 우리는 바깥 정취에 한껏 취해 8시간의 긴 기차여행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열차는 45분 정도 지연된 6시 15분에 마침내 우리를 카타니아역에 내려놓는다. 드디어 신화의 땅이기도 한 시칠리아에 온 것이다. 앞으로 3주간의 본격적인 시칠리아 여행, '신이 세상을 창조한 후 너무나 기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방울이 바로 시칠리아입니다.' 이런 시칠리아 사람들의 자긍심이 사실일까? 헛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