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를 받으니 또 가을이 왔군요." 나에게 단풍잎 책갈피를 받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단풍잎과 은행잎 고운 빛깔을 볼 때마다 하늘 한쪽 바람 한자락 들여 놓기를 바라는 작은 선물이다. 은행잎과 단풍잎은 책갈피의 재료로 더없이 좋다. 색감이 화사하고 손잡이 모양이 길쭉해서 제격이다.
가을이면 창덕궁 후원을 방문한다. 찬 기운을 머금은 가을 바람이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놓은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무슨 빛이라 말해야 할 지 고민 될 정도로 오묘한 감정까지 덪칠되어 있다.
자기 소임을 다하고 떨어진 단풍잎 중에서 코팅 하면 예쁜 모양이나 독특한 모양이 나올 만한 것을 모은다. 어떤 것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도 있다. 비바람 들락거린 흔적까지 그대로 보듬고 있다.
다양한 잎을 책 속에 넣어서 말린다. 그러면 단풍잎이 어렵고 어지러운 책 속 말들을 밀어내고 들어와서 더 붉게 피어난다. 가을을 알리며 노래하던 그들 몸이 시가 된다. 책속에 넣어둔 하늘과 바람과 꽃과 별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 끝내 시로 돌아가고 있다.
그 쯤이면 바싹 마른 잎을 책속에서 꺼내 코팅지에 차곡차곡 넣는다. 예열이 된 코팅기에 단풍 품은 코팅지를 하나씩 밀어넣는다. 뜨거운 코팅지의 앞과 뒷면 사이에서 단풍은 진공상태로 박제가 되어 새로 탄생된다. 하나씩 가위로 잘라주면 드디어 책갈피가 완성된다. 더 붉게 피어나는 코팅된 단풍잎 책갈피를 여러 모임에서 나누어준다. 사람들은 예쁜 모양이나 색깔을 찾지만 나는 가슴에 구멍 숭숭 뚫려 휑한 잎들에 더 손길이 간다.
항암치료로 독한 약물들이 내 심장까지 공격을 해서 숨도 안쉬어지던 날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과 미워했던 마음들, 더 가지려고 욕심 부렸던 수많은 일들이 내 가슴에 구멍을 내고 메울 수 없는 병의 흔적으로 남았다. 나는 지난 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구멍 숭숭 뚫린 휑한 잎에 더 손길이 갔다. 마취약에 의해 내가 깊은 어둠으로 내려갔을 때 의사는 그늘진 병의 등을 사력을 다해 도려냈다. 폭풍우가 다녀간 수술 흔적을 남기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뜨거운 코팅지를 통과해서 새로운 작품이 된 책갈피처럼 종양을 제거하느라 깊은 어둠으로 내려갔다가 온 나도 새로운 또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했다.
그런데 작년에는 처음으로 책갈피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항암치료 후 겨우 버티던 간당간당한 마음과 육체가 지쳤던 모양이다. 더 많이 아팠을 때도 꼭 만들던 책갈피였는데 어쩜 육체의 아픔보다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다.
올해는 책갈피를 꼭 다시 만들어보겠다. 여러 사람들의 손에서 곱게 피어날 단풍잎 책갈피가 벌써 발그레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