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크루즈 갑판 위에 비가 내린다.장마가 지나가고 한참이나 되었는데 휴가철에 내리는 비는 짖궂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달아오른 한여름의 아스팔트를 버리고 떠났다. 한 뿌리를 가진 다섯 개의 가지인 우리 5남매가 전국에서 여수로 모여들었다. 장소를 바꾸어가며 30년째 함께 보내는 여름휴가는 매번 다채로운 설렘들이 기다리고 있다.
팬션 테라스에서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서로 깔깔거리며 바다를 통째 들여놓은 듯 기울였다. 테라스 너머 옹기종기 누운 섬들이 꼭 우리 5남매를 닮은 층층나무 같았다. 아침이 문을 활짝 열었다.
여행지에서의 하루 시작은 기대감으로 발걸음도 마음이 부푼다. 줄지어 가는 형제들에 조카까지 더해 앞선 사람 뒤따라 오는 느린 걸음을 꼬리까지 챙기려면 숫자를 세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이름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미남크루즈가 출발의 기적을 울렸다.
벽화마을도 지나고 운치를 더하는 섬들을 돌아나간다. 꼭대기 갑판에서 5남매가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떠느라 왁자지껄하다. 오락가락 하며 짖궂게 신발에 빼곡 차오르던 소나기가 또 찾아들었다. 그 많던 사람들 일제히 선내로 또는 빗물가리개 속으로 대피를 한다. 이제 갑판 위에는 나와 5남매만 우산을 받치고 남았다. 비를 좋아하는 까닭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은 내게 그 어떤 때보다 마음이 가볍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오락가락 하던 비 때문에 비상용으로 손에 들고 다니던 우산을 펼쳐들었다. 투명비닐 우산 위에 빗방울이 경쾌하게 구르기 시작했다. 우산을 든 채 갑판 이곳저곳 빗방울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소나기에 지루하게 몰려있던 사람들은 빗속에서 혼자 춤추는 나를 뮤지컬 한편을 관람하듯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형제들은 안스러운 표정과 함께라는 안도의 숨을 쉬며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
휴가를 오기 직전 병원을 갔을 때의 일이다.
"축하드려요 산정특례 기간이 끝이났어요."
"선생님 아직도 수술부위 통증이 화산 분출하듯 아파 누워서 잠도 못자는데 산정특례기간을 연장시켜주시면 안될까요?" "지금 상태는 5년 암투병의 완치라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산정특례가 연장되지 않은 것이 감사할 일이지요. 잘 견디느라 애쓰셨고 장하시네요." 오랜 치료과정을 끝내고 암투병의 완치판정을 내린 의사는 대학 4학년 때 돌아가신 내 아버지 같은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여전히 10년간은 먹는 항암제를 복용해야 하고 각종 통증에 시달리며 새벽까지 잠을 못자는 날이 허다하겠지만 그 말을 기분좋게 가슴에 담고 출발한 휴가였다. 그것을 알고있는 형제들은 나의 완쾌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해주었다.
발구르는 빗방울과 나는 손을 맞잡고 신나게 탱고를 추었다. 배가 종점을 찍고 돌아나와 이윽고 출발지를 향해 닿기 직전이었다. 나도 비의 손을 스르르 놓으며 관객들을 향해 무대의 마무리 인사를 정중히 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형제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