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숨결과 역사적 매력 탐방기
따스한 봄날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완전히 물러가고, 부드러운 햇살이 온 세상을 감싸는 날씨였다. 이런 날은 집에만 있기엔 너무 아까웠다. 파리 동쪽 끝에 자리 잡은 방센느 성채(Château de Vincennes)를 방문하기로 했다. 46번 버스를 타고 도착한 성곽 앞에서 나는 설렘과 기대를 가득 안고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성곽은 멀리서 봐도 웅장했다. 두꺼운 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성벽이 중세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대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니, 따스한 햇살 아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햇빛을 만끽하는 사람들, 손을 꼭 잡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아이들과 함께 산책 나온 가족들… 그 모습들이 평화롭고 따뜻했다.
티켓을 확인받고 성곽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나라 언어로 된 안내 책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버전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한국어 버전은 없었다. 이곳에는 한국인 방문객이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어 버전의 안내 책자를 집어 들고 이곳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간단히 파악한 뒤, 안내 표지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성곽 내부는 오래된 돌로 이루어진 견고한 구조물로 가득했다. 화려했을 법한 벽화와 장식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몇몇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여전히 빛을 받아 반짝이며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했다.
각 방마다 설치된 사진과 설명판, 그리고 짧은 영상들이 이곳의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 누가 거주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하나씩 알아가며 중세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주탑(Donjon)은 방센느 성채의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높이가 50미터에 달하는 이 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중세 요새 중 하나라고 한다. 이곳은 단순히 방어용 건축물이 아니라 왕들이 머물렀던 공간이기도 했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같은 프랑스 왕들이 이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는 사실은 이 탑에 담긴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게 했다.
주탑 내부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층마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왕의 개인 거처, 회의실, 예배당 등이 있었으며, 최상층에서는 파리 전경을 조망할 수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공간을 사용했을지 상상해보았다.
성곽 위로 올라가니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리 외곽의 시내 전경과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성곽 위를 따라 한 바퀴 돌며 그 풍경을 천천히 감상했다.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중세의 한 순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성곽 위를 걷던 중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들과 함께 견학을 온 유치원생 혹은 초등학생들 같았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한결같이 "봉주르!"라고 밝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미소를 띠며 "봉주르"라고 답했다. 선생님들과는 눈인사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의 배려와 순수함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이들의 귀여운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성곽 아래로 내려가는 타원형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벽면에 새겨진 중세 시대의 문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많이 흐려졌지만, 여전히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성채 안에는 생트 샤펠이라는 고딕 양식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서 영어로 "헬로우"라고 인사하는 직원에게 티켓을 다시 체크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 내부는 의외로 소박했다. 화려한 외관과 달리 내부에는 특별한 장식이나 그림이 거의 없었다. 천장과 제단 주변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이 공간의 유일한 화려함이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성 요한의 묵시록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빛이 비칠 때마다 그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였다.
생트 샤펠의 고요함 속에서 잠시 명상에 잠겼다. 수백 년 전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들의 희망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이 이 공간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교회가 내부는 소박할까? 왜 벽화나 장식들은 퇴색되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까? 그리고 성채 안의 잘 관리된 다른 건물들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안내 책자를 자세히 읽어보았다. 방센느 성채는 12세기에 왕실 사냥 별장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14세기 샤를 5세 시대에 요새화된 성으로 발전했고, 1369년에 주탑이 완성되면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중세 요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생트 샤펠은 1379년 샤를 5세에 의해 건립되기 시작했다. 높이 20미터, 길이 40미터, 폭 12미터라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단일 층으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걸작이다. 특히 앙리 2세가 기증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술적 가치가 높아 많은 관광객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방센느 성채는 단순히 왕실의 거처나 요새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역사 속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시대의 변화를 함께 겪어왔다. 17세기에는 루이 14세가 이곳에 머물렀고, 18세기에는 왕실 도서관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무기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세기에는 군사 요새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치며 성채의 모습도 조금씩 변화해왔다. 원래의 중세 양식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더해지면서 독특한 건축물로 발전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전쟁과 혁명을 겪으며 많은 부분이 훼손되거나 변형되었고, 이는 내가 보았던 희미한 벽화와 장식들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성채를 나서며,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프랑스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임을 실감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과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방센느 성채는 나에게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게 해준 특별한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여행 작가로서, 이런 경험들이 내 글과 삶에 큰 영감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기록해 나갈 것이다.
*방문객들에게 추천하는 사항*
방센느 성채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특히 봄이나 가을철에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의 날씨는 따뜻하고 편안해 성곽을 둘러보기에 최적입니다. 또한, 성채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하기 위해 햇빛이 잘 비치는 시간대에 방문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성채 주변에는 다양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성곽을 둘러본 후에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프랑스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성채 근처의 보스 드 비엔느(Bos de Vincennes) 공원도 함께 방문하면 좋습니다.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큰 공원 중 하나로, 산책하거나 피크닉을 즐기기에 이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