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켜자 꼬마가 나에게 다가온다. 내 손에 있는 리모콘을 뺏어 자기가 보고 싶은 티비를 본다. 조금 더 지나자 밥을 먹을 때도 티비를 켠다. 밥 먹는 시간이 길어진다. 난 습관적으로 티비를 켜고, 아이한테 티비를 양보하고, 아이 엄마는 화를 낸다. 반복되는 상황이다. 지나가듯이 생각했다.
'거실에 티비가 없다면 켤 수 없을텐데.'
내가 서른 살 때, 오래된 22평 아파트에서 혼자 산 적이 있다. 그 집에 거실이 있었다. 쇼파와 티비를 거실에 설치하고 난 후 난 티비를 주로 봤다. 너무 티비만 보는 것 같아 컴퓨터를 거실로 옮겼다. 그러자 티비와 컴퓨터를 동시에 켜놓고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일이 늦게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씻지도 않고 쇼파에 파묻혀 티비를 늦게까지 보기도 했다. 지나가듯이 생각했다.
'이건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듯 하다.'
티비를 침실로 옮겨 보기로 했다. 그러자 컴퓨터로 미드와 일드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 보기로 했다. 그래서 책을 샀다. 하지만 책을 잠깐 보고 나서 다시 미드를 보고 있었다. 혼자사는 서른 살 직장인은 바람직하게 살 수 없는 걸까? 도전은 계속 되었다. 1000 조각 직소퍼즐을 샀다. 책보다 훨씬 낫다. 비록 컴퓨터를 켜 놓았지만 퍼즐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보다 뿌듯했고 성취감도 있었다. 두 번째 퍼즐을 맞췄다. 그리고 잘 포장해서 지인에게 선물했다. 반복되는 성취감은 아주 조금씩 자존감을 자라게 하는 듯 했다. 그래서 블로그도 시작했다. 퍼즐을 맞추고 프라모델을 만들고, 책을 읽고 블로그를 썼다. 내가 손수 무엇인가를 행하는 즐거움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컨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에서 직접 만드는 생산자로 변신한 것이었다. 거실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지나가듯이 생각했다.
'공간에 무엇을 채우는가는 정말 중요하구나.'
아이와 난 거실에서 놀다가 항상 티비를 틀었다. 아이는 티비에 빠졌고 아내는 화를 냈다. 악순환이었다. 지나가듯이 생각했다. 거실에 티비가 없으면 안 켤텐데.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티비를 없애면 어떨까? 티비를 아예 없앨 수는 없을텐데. 티비를 다른 장소로 옮기면 어떨까? 거실에 있는 티비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티비를 어디에 둬야할까? 침실에도 아이 방도, 내 방도 티비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내가 티비를 옮기자고 말하자 아내는 내가 티비를 켜지 않으면 된다며 언성을 높였다. 티비 보지 말라고 했더니 티비를 안 방에 넣는다고 하니 화가 났나보다. 그 후 티비를 켜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더 이상 날 질책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듯이 생각했다.
'문제는 내 자신이 아니라 환경일지도 몰라.'
며칠 동안 티비 옮기는 방법을 생각했다.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안 방 벽에 붙인다. 두 번째는 티비를 떼서 내 방에 놓는다. 세 번째는 내 방을 없애고 티비 방으로 만든다. 안방에 티비를 설치하자는 말에 아내가 기겁을 한다. 자기가꾸며 놓은 집을 내가 엉망으로 만들까봐 걱정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방법은 실패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법은 내가 싫었다. 그래서 아내가 왜 싫어했는 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내 방에 티비를 설치하는 것도, 내 방을 티비 방으로 만드는 것도 결정하지 못 했다. 그래서 티비를 떼서 내 방 구석에 놓았다. 티비가 없어지자 아이는 티비를 보지 않았다. 아내도 티비 때문에 화를 내지 않았다. 곧바로 아이는 다른 놀이를 찾았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인 것을. 아이는 티비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놀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아이도 아내도 아주 가끔 티비가 필요했다. 지나가듯이 생각했다.
'티비가 나쁜 건 아니지. 지나치게 많이 보는 게 나쁜 거지.'
난 다시 고민에 빠졌다. 고민은 이제 단 한가지만 남았다. 내 방을 포기하느냐 마느냐? 너무 갖고 싶던 나만의 방, 남자의 로망인 서재. 나만의 공간을 포기할 수 있을까? 결정은 점점 미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