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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사람 Dec 21. 2024

이별, 극

마침표를 정해둔 사랑 이야기.

*



 헤어지자.



 아마도 이 대화는 이렇게 끝을 맺을 거다. 네 문자를 받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남보다도 활자로 감정을 주고받는 사이였으니까.



 그러니 너도 알고 있을 거다. '내일 뭐 해'라는, 네가 보낸 한마디 문자로 내가 네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흐릿한 시선에 네 모습이 또렷하게 울린다.



 어색한 인사. 멋쩍은 웃음. 덧없는 손길.



 그것으로 우리의 극본은 시작을 외쳤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초침을 하나씩 밀어내면서.




 *




 빨대에 입을 대고 차가운 라떼를 쪼르륵 마셨다. 달콤한 시럽과 쌉쌀한 카페인 맛을 입안에 품고 네 쪽으로 눈길을 두었다. 네 시선은 내가 아닌 탁자 귀퉁이 어딘가에 꽂혀 있다.




 "오랜만이네."




 상투적인 네 문장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이지. 자그마치 다섯 달 만이니까.




 "잘 지냈어?"




 이번에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잘 지내지 못했다. 너 때문에.




 "뭐 하자고 부른 거야?"




 덧없는 인사말에 싫증이 나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반년 정도 지내왔던 지난번 동거를 제외하면,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날은 항상 무언가 이유가 있는 날이었다. 1주년 기념일이라던가, 둘 중 한 사람의 생일이라던가. 그런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우리는 항상 문자로 소통해 왔다. 장거리 연애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만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오늘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이곳에 불러낸 건지.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뭐 때문에 너를 부른 건지."




 담담한 말투로 네가 말했다. 역시, 너는 나를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싫다. 네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 잔소리 하나까지도.



 너는 언젠가부터 변했다. 나와 함께 '꿈'을 이야기하던 네 목소리는 이제 '현실'을 말하고 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를 못으로 박아버리는 잔혹한 소리. 그 딱딱한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마치 설교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먼저 꿈에서 도망친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이야기를 해대는 건지.




 "그래서. 그거 한마디 하자고 부른 거야? 이제는 또 시간이 잘 나나 봐? 저번에는 바쁘다고 답장 한마디 제대로 안 하더니."


 "그때는 진짜 바빴잖아.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그래. 바빴겠지.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리면서 노느라."


 "야, 그게 무슨..."




 네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전부 지켜봤다. 인스타 스토리에 네가 올려둔 사진들, 전부.





 "같은 회사 사람이더라? 단둘이서 밥도 먹고 엄청 가까워 보이던데."


 "야, 걔는..."


 "걔? 그렇게 부를 정도면 엄청 친한 거 맞나 보네."


 "......"


 "그래서 이렇게 부른 거야? 나랑 정리하고 걔랑 만나려고?"




 마음속에 피어난 열꽃을 그대로 토해냈다. 짜증 났다. 내가 네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와야 한다는 것이. 다섯 달 전에도 그랬다. 반년 정도 이어왔던 동거를 끝냈던 그때, 이 관계만큼은 유지하고 싶다며 나를 붙잡은 건 너였다. 그러고서는 그 뒤로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니, 인제 와서 갑자기 또 헤어지자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 건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헤어지는 게 맞았다. 이미 우리의 연애 감정은 바닥났다. 네가 이삿짐을 싸 들고 우리 집에서 나가던 그날부터, '연인'으로서 우리의 관계는 끝난 셈이다.



 머리가 지끈거려 차가운 라떼를 들이켰다. 양복 왼쪽 가슴에 출판사 명찰을 달고 있는 네 모습 위로 과거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후줄근한 후드티를 입고, 어정쩡한 머리로 쭈뼛거리며 앉아있던 예전의 네 모습. 난 너의 그 어리숙함이 좋았다. 적어도 그때의 너는 '꿈'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너와 만났던 건 대학교 술자리였다. 술이든 친구든 별로 흥미 있는 쪽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간에 학과 친구를 사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나온 자리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지금은 기억도 별로 남아있지 않다. 몇몇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는 술잔만 몇 번 홀짝일 뿐이었다.



 그때, 내 건너편에 앉아있던 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이만 집에 가봐야겠다며 너는 말을 뱉어냈다. 그 순간 너를 쳐다보던 옆자리 선배의 얼빠진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좀 더 놀다 가라는 선배의 제안에도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덕분에 용기를 얻은 나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술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오는 주점에서 나오자, 적적한 밤거리를 홀로 걷고 있는 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동질감이 들어서였을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져 너에게 다가가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쪽도 이런 술자리는 별로 취향이 아닌가 보네요."




 내 말에 너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다가, 네 취미가 소설 쓰기라는 걸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너는 아마도 모를 거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그 짧은 15분 동안 우리는 15년 지기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헤어지기 전에 우리는 기숙사 문 앞에서 서로 번호를 교환했다.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간표가 맞지 않아 만나는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너와 연락하는 모든 시간이 좋았고, 너와 만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 맞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했었다.



 뭐, 그것도 이제는 전부 옛날이야기지만.




 "너, 혼자서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매번 그런 이상한 망상 하는 버릇 좀 고칠 수 없어?"


 "망상이라니. 모르는 여자애랑 밥 먹고 다니는 게 망상이야? 이건 현실이잖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현실."


 "그러니까, 왜 거기서 생각이 그렇게 넘어가는 건데. 요즘 너 이상해. 내가 취업하고 난 이후부터 계속 그러잖아. 저번에는 고등학교 선생님 인사드렸던 것도 왜 여자랑 단둘이 만났냐면서 뭐라 그러고."




 팔짱을 낀 채로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 발로 바닥을 두들겼다. 내가 이상하다니. 아니, 그럴 리 없다. 이상한 건 네 쪽이다. 매번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사람을 만나고 다니면서 정작 나한테는 연락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으니까.



 그래, 생각해 보면 그게 문제였다. 우리 관계가 수틀리기 시작한 건 네가 출판사에 취업하고 나서부터였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네가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네 모습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쳐다보던 네 꿈은 사라지고, 너는 언젠가부터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전광판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이 싫었다. 준비하고 있던 공모전은 전부 내팽개치고 현실의 빛에 안주해 사는 네 모습이 싫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네 핑계 따위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부족한 돈이야 알바로 충당하면 그만이었다. 나날이 불어 가는 학자금 이자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당장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매번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런 망상을 하는 거겠지.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벌써 스물일곱이잖아. 취업하면 글을 못 쓰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문제야?"




 또 잔소리. 듣기가 거북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가끔 보면 너는 점점 내 아빠를 닮아가는 것 같다. 당장 보이는 현실에 집중하는 모습이 똑같다. 쳇바퀴 같은 삶. 단체 속에서 굴러가는 작은 부품. 그런 삶을 살기 싫어서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걸 분명 너에게 말했던 것 같은데.



 라떼를 다시 한번 들이켰다. 컵 안에 들어있던 얼음이 녹아 밍밍한 맛이 났다. 괜스레 올라온 짜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마시던 컵을 내려놓았다.



 이제 됐다. 더는 너와 말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전개는 충분히 채웠으니, 이제 이 극본에 결말을 내릴 차례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그만하자. 이미 서로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까."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킨 다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찬민아, 나가는 거야?"


 "어, 슬슬 가야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가늘게 뜬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일곱 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회사랑 거리가 먼 탓에 찬민이는 매번 이맘때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출근한다.




 "어제 도시락 만들어뒀으니까 챙겨나가. 간단하게 샐러드로 챙겨놨어."


 "응, 잘 먹을게. 고마워."


 "그리고, 이거."




 찬민이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찬민이는 가볍게 웃은 다음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줬고, 나도 그런 찬민이를 껴안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찬민이의 온기에 배시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잘 다녀와. 오늘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따가 연락할게."


 "응응. 기다릴게."




 고개를 끄덕이고 찬민이의 품 안에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큼한 바닐라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헤어지기 싫어.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가면 안 돼?"




 찬민이를 향해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말했다.




 "안돼. 나 지금 가야 하는 거 알잖아."


 "그럼 1분만. 응?"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애원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찬민이는 "진짜 딱 1분 만이야."라는 말과 함께 나를 꼭 안아줬고, 약속한 시각이 지나자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현관문 바깥으로 나갔다.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 찬민이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 거실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도 부지런히 글을 써야 한다. 이제 공모전 마감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퇴고까지 생각한다면 꽤 빠듯한 일정이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작업할 때 마실 커피 믹스를 책상 위에 얹어뒀다. 그렇게 그대로 작업을 시작하려던 찰나.



 -



 느닷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동생인 소영이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 언니, 여기 공동현관 비밀번호 뭐더라? ]




 아차. 연락을 확인한 순간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소영이가 오는 건 내일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날짜를 잘못 기억했던 모양이다.




 [ 8123 ]




 답장을 남긴 뒤 간단하게 거실을 치웠다. 만약 중요한 손님이었다면 청소기를 돌려 바닥을 쓸었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소영이는 이 집에 꽤 자주 놀러 오는 편이니까. 최근엔 더욱 그렇다. 새로 옮긴 회사가 이 집과 가깝다는 이유로, 어떨 때는 이곳에서 자고 가는 날도 있다. 부모님 몰래 찬민이랑 동거하는 걸 눈감아주는 대가라나 뭐라나.



 식탁 위에 굴러다니던 페트병 수거가 끝날 즈음, 현관문 너머로 도어락 소리가 삑삑 들려왔다.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준 기억은 없는데 신기한 일이다.




 "어, 왔어?"


 "어, 또 왔어."




 소영이가 킥킥대며 현관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그러더니 현관 한쪽에 놓아둔 꽃병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이거 아직도 안 버렸어? 저번에 버린다더니만."


 "아, 그게...응. 안 그래도 오늘 버리게."


 "정리 안 하고 사는 건 여전한가 보네. 찬민 씨가 우리 언니 어떻게 케어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야, 그래도 여기서는 나름 정리하고 살거든."




 거짓말은 아니다. 적어도 예전 본가에 있던 내 방보다는 깨끗하게 쓰고 있으니까.




 "네네. 정리하고 사시겠죠. '나름'."


 "오자마자 집주인한테 무슨 시비야. 쫓겨날래?"


 "진짜로 쫓아낼 것도 아니면서 무슨. 저번에 내가 사다 놓은 아이스티 아직 남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소영은 부엌 선반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남았다. 그때 소영이가 사줬던 건 자그마치 160개짜리 고형 차 세트였으니까. 곧장 부엌으로 걸어가 구석에 놓아두었던 아이스티 포 몇 개를 꺼내주었다.




 "지금 먹을 거야?"


 "응. 얼음 둥둥 띄워서 부탁해요~"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핸드백을 거실 소파 위에 얹어놓았다. 그동안 본 적 없던 디자인이다. 이번에 좋은 회사로 이직했다더니만, 그 돈으로 새로 사들인 모양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똑같지 뭐~ 공모전 때문에 요즘 바빠."


 "공모전? 지난번에 했던 거랑 또 다른 거야?" 영혼 없는 말투로 소영이 말했다.


 "그거 벌써 작년 얘기거든."


 "작년? 그게 벌써 그렇게 됐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는 자주 놀러 오면서 집주인인 나한테는 별로 관심도 없나 보다. 진짜 확 내쫓아버릴까.




 "너는 뭐 하고 지냈어?"


 "나? 나는 저번에 이직했잖아. 적응하느라 한참 정신없지. 아, 맞다. 나 썸남 생겼어."


 "썸? 누구?"


 "같은 부서 사람."


 "누군데? 사진 보여줘."




 내 요청에 소영은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남자 사진을 보여줬다. 보정이 조금 들어간 것 같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얼굴이다.




 "뭐... 그냥저냥 괜찮네."


 "아니, 세상에. 그냥저냥이라니. 이 정도 잘생긴 사람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찬민 씨만 맨날 보니까 언니 눈이 멀었나 보네."


 "그 정도까지야? 아닌 것 같은데."


 "하, 부럽다 한소은. 나도 한소은의 삶을 하루만 살아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찬민 씨가 옆에 있을 거 아냐. 그러면 바로 그냥...와..."


 "얘가 또 헛소리하네. 탐낼 걸 탐내야지."




 주먹으로 소영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꾸미기 시작한 이후로 찬민이가 부쩍 잘생겨진 건 사실이긴 하지만, 가끔씩 들려오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내가 찬민이를 너무 오래 봐와서 무뎌진 걸까. 뭐든 간에 상관은 없다. 애초에 내가 찬민이랑 사귀기 시작한 건 외모 때문이 아니니까.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찬민이는 동반자 같은 사람이다. 부모님도, 소영이도 이해해주지 못한 내 꿈을 찬민이는 이해해 줬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해 줬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찬민이에게 바라는 건 사랑 하나뿐이다.




 "요즘 찬민 씨랑은 어때? 잘 지내?"




 빨대로 아이스티를 휘휘 젓던 소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먹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아마도 몇 주 전이었으면 "그럼. 당연하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말문이 목에 걸려 튀어나오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찬민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퇴근 후에는 피곤하다며 곧바로 잠들어버리는 날이 잦았고, 매일 아침 안아주는 것도 이제는 내가 먼저 요청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무언가 일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찬민이랑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한테는 삶에 있어 유일한 즐거움이니까.



 실은, 그 문제 때문에 어제 한바탕 싸우기도 했다. 여태껏 찬민이랑 사귀면서 말다툼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찬민이와의 관계가 조금씩 예전과 달라지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날 밤 혼자 이불속에서 몇 시간을 내리 울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 당연히 잘 지내지. 별일 없어."




 애써 웃으면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단맛이 하나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쉽네, 불화라도 생겼으면 내가 찬민 씨 낚아채려 그랬는데." 소영이가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런 일 없으니까 꿈 깨셔."


 "치, 부럽네. 아주 그냥 부러워요. 7년을 사귀었는데도 여전히 알콩 달콩인 것 같아서."


 "그럼. 우리가 어떤 사인데."




 빠르게 말을 뱉어낸 다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숨이 가슴에 걸려있는 기분이었다. 심호흡을 해도 상태가 나아지질 않아 어떻게든 화제를 돌렸다.




 "회사 일은 할 만한 것 같아?"


 "음, 나름? 꼰대 상사 한 명 있긴 한데, 적응해 보면 되지. 돈 많이 주잖아~"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문양을 만들어 보였다.




 "언니는 어때? 취업할 생각은 여전히 없어?"


 "어? 음...아무래도 일단은...?"




 내 대답에 소영은 등을 뒤로 젖히면서 양팔을 엇걸었다.




 "그래, 취업도 뭐 언니가 생각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솔직히 나로서는 슬슬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품고 소영을 쳐다보았다. 나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어쩐지, 한동안 잠잠하더라.



 소영은 이따금 나한테 취업 쪽으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부모님한테 일방적으로 애정을 받으니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다. 그 인간들의 뒤틀린 사랑 따위, 별로 관심도 없는데.



 우리 부모님은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당신들과 똑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셨고, 그렇기에 내 모든 것을 감시하고 간섭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도 매일 저녁이 되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돌아왔는지 말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조차 전부 보고해야 했다.



 그런 속박에 지쳐있던 내가 택한 것은 글이었다. 소설 속 글자들은 나를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처음 맛본 해방감에 금방 빠져든 나는 하루에도 몇 권씩 소설을 읽었고, 언젠가 나도 이런 글을 쓰리라 다짐하며 남몰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국어국문학과를 진학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부모님한테는 국어 교사가 되고 싶어 선택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은 내 작문 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 고른 학과였다. 다른 사람이 정해준 길이 아닌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7년을 보내왔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분명히 성공할 텐데, 인제 와서 남들의 손에 떠밀려 취업 같은 걸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취업을 한다는 건 내 선택이 틀렸다는 거니까. 어릴 때부터 나를 줄곧 묶어왔던 당신들의 길이 옳았다는 거니까.



 그건 싫다. 죽어도 싫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들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저기. 나 공모전 일정이 조금 빡빡해서 오늘도 글을 좀 써야 할 것 같거든.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남아있던 아이스티를 전부 비워내고 소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소영은 내 얼굴을 힐끗 살피더니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다음에 다시 올게.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소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손을 흔들면서 소영을 현관 앞까지 배웅해 줬다. 그리고, 소영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어깨에 넣었던 힘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진동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찬민이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 저녁에 할 이야기 있어 ]




 오늘 아침에 청소하면서 보내두었던 내 기다란 응원문자 밑으로, 네 짧은 문장 하나가 문자로 넘어왔다.



 가슴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든 생각이 하나 있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럴 리 없다. 비록 어제 크게 싸우긴 했지만, 설마. 그럴 리가.




 [ 알겠어. 기다릴게. ]




 답장을 보낸 다음 핸드폰을 집어넣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머릿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져보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과한 걱정일 거다.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다.



 ...분명, 괜찮을 거다.




 *




 머리가 멍했다. 이어폰을 끼고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해 보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들려오질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귄 일수를 계산해 주는 연애 다이어리 어플을 삭제했다. 2500을 갓 넘겼던 숫자가 0으로 되돌아간 걸 보니 어딘가 기분이 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감 나지 않는다. 내가 이제 너와 남이라는 것이. 다시는 널 볼 일이 없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질 않는다. 지난 7년간 너는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만하자는 네 말을 끝으로, 우리는 조금 전 카페에서 헤어졌다. 잘 지내라는 안부 인사는 서로 하지 않았다. 너는 감정 없는 형식적인 말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의 이별은 깔끔하게 떨어졌다.



 자취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두 눈을 깜빡였다. 잘한 짓이 맞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었냐 묻는다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처음으로 말싸움을 했던 그날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엇나가 있었다.



 내가 출판사에 취업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어머니의 수술 비용을 병원에 입금하고 나서부터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의 나는 어머니의 수술 비용 따위 갖고 있지 않았다. 느닷없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처음에는 너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공모전 준비로 정신없는 너에게 괜한 걱정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 관두기로 했다. 너 몰래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렸고, 급전을 마련해준다는 대출 상품은 4 금융까지 빠짐없이 전부 찾아봤다.



 그렇게 비용을 입금하고 어머니의 수술이 시작된 날, 수술실 밖에서 다리를 벌벌 떨며 멍한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현실은 냉혹했다. 애써 외면하며 지내왔던 사회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잔혹했다. 돈이 없으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걸, 그 간단한 이치를 나는 스물일곱이 돼서야 깨닫고 말았다.



 이런 일을 반복해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돈을 벌고자 취업을 결심했고, 머지않아 중견 기업의 출판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출퇴근 거리가 멀어 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지만 괜찮았다. 너를 지킬 힘만 얻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너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지갑 사정에 여유가 생기니 생활에 여유가 생겼고, 단순한 연인을 넘어 평생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함께 일하면서 돈을 벌어 결혼 자금을 마련하고, 그렇게 몇 년의 준비가 끝나고 나면 평생 계속될 언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획은 첫 단추부터 꼬여버렸다. 취업을 해보는 게 어떻냐는 내 제안에 네가 잔뜩 화를 내면서 거절한 것이다. 네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씁쓸한 미소로 알겠다는 답변을 건넸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결혼도 하지 못할 테고, 그러면 우리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텐데. 너는 나와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은 걸까. 7년을 함께 해왔지만, 너는 이 관계의 끝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걸까.



 불길한 생각이 들어 일주일 정도 네 말과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굉장히 간단했다. 너는 아직 스무 살의 연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단지 그뿐이다. 결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너는 단지 이 '연인'으로서의 관계가 평생 가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체적인 나이는 동갑이지만, 연애에 있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일곱 살 차이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던 거다.



 핸드폰을 켠 다음 너와 그동안 나누었던 문자들을 살펴봤다. 가장 밑에서부터 스크롤을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글자를 읽었다.




 [ 그럼 저녁에 만나자. 너 집 앞 카페에서 기다릴게 - 찬민 ]


 [ 내일 아무 일도 없어 - 소은 ]


 [ 내일 뭐해 - 찬민 ]




 [ 뭐하자는 거야 - 소은 ]




 [ 뭐하고 있어? 바빠? - 소은 ]




 [ 많이 바빠? 연락이 안 되네 - 소은 ]




 [ 저기, 우리 계속 사귀자는 말 진심이야? - 소은 ]


 


 [ 알겠어. 기다릴게. - 소은 ]


 [ 저녁에 할 이야기 있어 - 찬민 ]


 [ 아침에 많이 피곤해보이던데 도시락 꼭 챙겨먹어! 샐러드에 자기가 좋아하는 양배추랑 토마토 잔뜩 넣어놨어 ㅎㅎㅎ 혹시나 힘든 일 있으면 꼭 연락하구! 오늘도 사랑해  - 소은 ]




 별생각 없이 올리던 스크롤을 멈춰 세웠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옛 기억에 명치끝이 아려왔다.



 천천히 스크롤을 올렸다. 이 위로는 나날이 네가 보낸 응원문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래, 우리는 원래 이런 관계였었다. 매일 서로의 감정을 글에 담고 공유하면서, 얼굴을 맞대진 못해도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가까웠던 관계였었다.



 날마다 적어도 한 가지 일상은 공유할 것. 사귄 지 100일이 넘었을 즈음 우리가 만든 규칙이었다. 블로그 글 내지는 일기의 느낌으로 우리는 매일 일상을 공유했고, 서로의 일상에 솔직한 감상을 남기면서 소통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이 올라올 때면 다음에 먹자며 약속 일정을 잡았고, 과제를 찍은 사진이 올라올 때면 함께 머리를 맞대며 도와주기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서로의 본가에서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이 약속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가끔은 이런 공유가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매번 보내주는 네 정성 어린 답장 덕에 약속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의 거리감은 꽁냥꽁냥 붙어 다니던 대학교 시절에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이 년이 지날 즈음 자취방을 구했다는 네 연락과 함께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했다.



 목울대에 두꺼운 이물감이 느껴졌다. 지그시 눈을 감자 너와 함께 보냈던 모든 추억이 한순간에 흘러갔다. 분명 그때는 좋았었는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아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한 건 나였다. 네가 스무 살의 연애에 갇혀있는 동안, 나 역시 스물일곱의 연애에 갇혀있던 거다. 그러니까, 어쩌면.



 어쩌면. 이 모든 건 내 잘못이 아닐까. 우리가 엇갈렸던 것도. 우리가 헤어졌던 것도. 전부.



 ...전부.



 -



 일순간, 너에게서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이모티콘은커녕 문장부호 하나 없는 딱딱한 문장이었다.



 [ 잘 지내 ]



 멍한 눈길로 하얀색 박스 안에 갇힌 문장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완성된 메마른 활자만이 그곳에 존재할 뿐, 나는 그 안에서 네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단순히 형식적인 인사였던 걸까.



 아니면, 이제는 내가 네 감정을 읽을 수 없게 된 걸까.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떤 풀이가 됐든 결국 답은 같으니까.



 우린 이제 끝났다.



 단지 그뿐이다.



 그 이상 의미는 없다.




 *




 너와 헤어지기로 했다.



 정확히는, 내 안에서 네 추억을 지워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나는 지금 너에게로 향하고 있다. 어제 문자로 너와 약속을 잡아놨다. 동거를 끝낸 이후 처음 잡는 약속이니, 자그마치 다섯 달 만의 만남이다.



 이른 저녁 퇴근길, 복잡하게 얽혀있는 교차로 앞에서 차를 멈췄다. 이 도로는 항상 복잡하다. 처음 출근할 때만 해도 곳곳에서 울려대는 경적에 어버버 대며 운전대를 잡았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적응하고 말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너와 연락하지 않으면서 나는 그 적응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너는 내 전부였었다. 동거를 끝낼 때 내가 너와 헤어지지 말자고 말했던 것은, 이미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너를 한순간에 지워버릴 자신이 없어서였다. 마음이 맞지 않았을 뿐,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이제는 너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제 아침, 회사 출근길에서 문득 네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내가 네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너는 내 안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어느새 너는 과거의 추억으로 변해 있었다.



 차량을 주차한 다음 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왔다. 노란색 전구가 은은하게 빛나는 카페가 시선에 들어왔다. 대학생 시절 너와 자주 만났던 장소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글을 쓰기도 했던 곳. 추념이 맺힌 이 카페에서, 이제 나는 너와 함께 했던 과거를 지우려 한다.



 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밤공기가 가슴을 쿡쿡 찔렀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걸어왔다. 여태껏 쌓아온 이야기들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딱 한 가지뿐이다.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갔다.



 그리고, 네가 앉아있는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




 헤어지자.



 아마도 이 대화는 이렇게 끝을 맺을 거다. 네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그러니 나 역시 알고 있다.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네 시선에 담긴 내 낯빛만으로 네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쯤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또렷한 시선에 네 모습이 흐릿하게 울린다.



 어색한 인사. 멋쩍은 웃음. 덧없는 손길.



 그것으로 우리의 극본은 시작을 외쳤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초침을 하나씩 밀어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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