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2년생입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ADHD에 대한 개념이나 인식이 전혀 없었지요. 우리나라에 ADHD라는 용어가 알려지고 치료받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가 대략 2000년대 초반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내향인으로서 지극히 조용하고 얌전하며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고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산만하고 시끄럽기로 소문난 ADHD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혹시 제가 ADHD는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한 건 35살, 교육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 '조용한 ADHD'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얌전히 앉아서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팽글팽글 돌아가는 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동성도 강해 매우 중요한 결정도 쉽게 쉽게 내리며, 즉흥적으로 쇼핑하고, 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였으며, 과제는 미루기 일쑤고, 끈기 있게 공부하지 못했지요. 식욕에 대한 절제도 부족했고, 매사에 적당히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저의 독특한 성격이자 성향으로만 생각했어요. 이미 모든 교육과정을 마치고 직업 활동을 하고 있는 사십 대인데, 이제 와서 굳이 치료받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특수교사라는 직업이 저의 성격과 잘 맞아 업무적인 어려움이나 큰 실수는 없는 편이었습니다. 단지 내적인 고뇌가 깊었을 뿐이에요. 왜 난 남들처럼 야무지지 못할까, 왜 난 남들처럼 독하지 못할까, 왜 난 남들처럼 절제력이 없을까, 왜 난 남들처럼 똑 부러지질 못할까, 왜 난 남들처럼 부지런하지 못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으니 전 기간제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20대 때부터 임용고시를 준비해 왔으나,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어요.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돌아가고, 공부 시간의 70% 이상을 딴생각과 쓸데없는 행동(과자 먹기, 물 뜨러 가기, 책상 정리하기, 커피 마시기 등등)으로 소모했지요. 준비가 부족한 채로 시험에 응시했고, 결과는 당연히 참패였어요. 그렇게 몇 해를 반복하니 저도 지치고 시간과 돈이 아까워 임용고시를 접을 수밖에 없었죠. 몇 해를 공부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행복하게 지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제 나이 마흔셋. 결혼도 못했는데 딱히 모아둔 돈은 없고 기간제 교사는 고용이 불안정해요. 이제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해마다 이력서를 들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1년짜리 교사로 살겠습니까? 정년퇴직을 하고 싶고, 연금도 받고 싶지만 무엇보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 보는 것을 이제는 그만하고 싶어 졌어요. 그리고 상담에 관심이 생겨 교육대학원에서 상담교육을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임용고시는 상담으로 보고 싶고, 상담교사가 꼭 되고 싶답니다. 하여 다시 임용고시를 보기로 결심하였고,호기롭게 교육학 강의를 끊었지만 지금 거의 한 달 가까이 듣지 않고 있는 상태랍니다. 책상에 앉기까지도 힘들지만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 해도 머릿속에서는 오만 생각이 스쳐갔어요.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를 예약하고 두 달가량을 기다린 끝에 초진 상담을 받았어요. 난생처음으로 정신과를 방문하는 거였죠. 만약 제가 특수교육이나 상담교육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병원문을 두드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솔직히 저는 정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ADHD인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랬거든요. "나도 그래. 나도 공부하기 싫고, 책 읽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고 집중이 안 돼. 사람들 다 그런 거 아니야?"라고요. 사실 공부하기 좋아하는 변태가 어디 흔한가요? 책 읽다가 다른 생각 한 번 안 해본 분이 계시다면 제게 제보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단지 의지가 좀 약하고 게으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제 자신을 한 번 더 살펴보고, 간단한 심리검사를 받아 저를 더 자세히 알아가는 경험도 한 번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에 병원을 간 거였어요. 우리 반 아이들 중에도 ADHD 약물을 복용하는 아이가 있어요. 약물 복용이 필요해 보이는 학생들에게 저는 약물복용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편입니다. 저로 인해 약물복용을 시작하게 된 아이들도 있지요. 그만큼 저는 정신과나 약물복용에 대해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없었어요. 오히려 필요하면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죠.
그렇게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어요. ADHD 의심군은 맞지만, 사회 불안도 높았고, 양극성 장애 2형(조울증)도 진단받았거든요.
저에게 유아 시절부터 있던 사회 불안과 십 대 초반부터 시작된 우울감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는 남들도 다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냥 감기몸살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요. 더구나 내가 경조증이 있다니요. 전 그저 제가 우울감을 잘 다독이며 살고 있는 긍정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걸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한눈에 알아보시더라고요. 제가 굉장히 고조되어 있고 흥분되어 있다는 사실을요. 정신과에 방문해 본 적이 있느냐면서, 왜 오게 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제가 대답을 했는데 갑자기 제 말을 끊으시더라고요.
"잠깐만요. 말이 왜 이렇게 빠르죠?"
양극성 장애와 ADHD를 같이 진단받을 경우, 양극성 장애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하네요. 양극성 장애 때문에 ADHD처럼 보일 수 있다고요. 그리고 ADHD 치료 약물을 쓰면 조증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하셨어요. 양극성 장애를 치료해도 ADHD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공존한다고 보고 함께 치료하겠다고 합니다. 한 달 분의 약을 받아 들고 집에 왔어요. 리단정, 아빌리파이정, 렉사프로정. 자기 전에 한 번 먹는 약들입니다. 약을 한 보따리 받아 들고 보니 정말 제가 정신병 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우울하고 두려워졌어요. 제가 우리 반(모 초등학교의 특수학급) 아이들처럼 정신과 약을 먹는다니요.
사회불안이 극심하던 유아기부터, 아니 본격적으로 우울감을 느끼고 성적이 떨어지던 13살쯤부터, 아니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며 방황하던 이십 대 중반부터라도, 아니 처음으로 제가 ADHD를 의심했던 35살에라도 치료를 시작했더라면, 저의 인생은 달라졌을까요? 제가 약물치료를 시작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공개해야 할까요? 혹시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면 언제쯤 말해줘야 할까요? 저는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할까요?
저의 양극성 장애, 어찌 보면 제 인생에 큰 지장이 없었고, 또 어찌 보면 제 인생에 큰 지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음의 안정과 중심을 잘 잡고 싶습니다. 저도 절제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도 공부에 집중해서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습니다. 저도 깊은 우울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