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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도인 Nov 27. 2024

프롤로그.

제가 많이 이상한가요?

제 기억의 첫 장면은 다섯 살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다섯 살의 어린 소녀는 말없고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 앞에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습니다. 주로 동화책을 읽거나 종이인형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가족들 앞에서는 말을 곧잘 했습니다. 말을 할 때는 어찌나 빠른지, 엄마는 제게 항상 '오토바이 바퀴를 달았냐'라고 놀렸습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벙어리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말을 아꼈지만, 집에서는 꽤나 신경질적이고 짜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니보다 더 많이 혼났던 것 같습니다.


동화책을 좋아해서인지 저의 머릿속은 온통 동화 속 세상이었습니다. 옷장을 열면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어느 건물의 지하실 계단을 려 갈 때면 괴물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있자면 떠내려오는 나뭇잎에 엄지공주가 타고 있을 것 같았고,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마치 제가 탤런트가 된 것 같아서 남몰래 거울 앞에서 연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 머릿속의 동화는 유년 시절의 동화로만 끝나지 않고 어린이 시절을 지나 청소년에서 성인이, 성인에서 중년이 될 때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동화 속 요정이나 공주 대신 '언니나 남동생이 죽으면 난 외동딸이 되겠지?' 하며 외동딸이 되는 상상을, '커서 어른이 되면 난 어떤 옷을 입을까?' 하며 어른이 된 후의 헤어나 메이크업을, '나의 신혼여행은 어떨까?' 하며 신혼여행에서의 첫날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머릿속의 동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되었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지루한 수업 시간이면 어김없이 머릿속 동화를 상영했습니다. 네 살 무렵에 한글과 숫자를 저절로 깨우칠 만큼 영특했던 저의 학업 성적은 나날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내면적 방황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공부는 하기 싫은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딱히 재밌지 않았고, 이상하게 친구들의 개그코드와는 엇박자가 났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왜 웃는지, 왜 우는지, 왜 화내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공부는 너무 하기 싫었고, 국어 시간과 책 읽기는 조금 재밌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에서 배운 탈춤에 빠져 2년 간 전수관에서 은율탈춤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어 시간과 소설책이 그나마  재밌어서 국문과에 갔고, 드라마'로망스'에서 나오는 국어선생님이 멋있어 보여서 국어선생님이 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되려면 '교원임용고시'라고 불리는 시험을 패스해야 하는데 이게 웬걸, 도무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집중을 하려고 해도 내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동화가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교사가 되어 교직생활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시험에 합격해서 합격수기 쓸 내용을 구상하기도 하는 등 머릿속에서 자동상영 중인 동화로 인해 공부를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다잡아도 좀처럼 집중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없는 살림에 독서실과 인강을 끊어주는 부모님께 죄책감을 느끼고, 정신 못 차리는 저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시간들만 거듭거듭 쌓여갔습니다.


그렇게 다섯 살 소녀는 나이를 먹고 어느덧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어쩐지 저는 다섯 살에서 단 한 살도 먹지 못한 기분입니다. 다섯 살 때나, 마흔세 살인 지금이나 제 머릿속에는 그때부터 시작된 동화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다 커버리다 못해 늙어버린 지금은 동화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아무리 외쳐 보아도 머릿속 동화책은 덮일 날이 없습니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 경차를 장만하고, 치아 교정을 하고, 두 번의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결혼도 못하고 모아둔 돈도 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이제는 절실하게 '정년과 연금'보장되는 직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포기했던 임용고시를 다시 준비해 보고자 교육학 인강을 끊고 책을 펼쳤는데, 역시나 머릿속 동화가 너무나 시끄러워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책을 덮고 정신과를 예약했습니다.


저의 예감이 맞다면 전 아마도 조용한 ADHD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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