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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순이알렉시오 Oct 02. 2015

도전 의식

편하게 글을 써본지도 오래된 것 같다. 


자칭 '의식의 흐름 기법' 혹은 '영혼의 언어'라 불리우는 편지를 주고받던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있으니 편지인 것은 분명한데도, 워낙에 평소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한 터라 청자를 고려하지 않고 화자의 이야기만 줄줄줄 쓰더라도 쿵하면 짝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런 사이 간의 '글'. 


고등학교, 대학 친구들이 그대로 블로그 이웃인 블로그를 운영했었다, 아니, 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남 보여주는 일기장! 분명 웹 상이지만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인간관계. 실명의 친구들과 공간이 마구잡이로 등장하며 어쩔 땐 어제 본 영화나 책이 너무 감명깊어 써내려간 글도 있었고, 어쩔 땐 염세적이 되어버린 내 감정을 배설해놓은 글도 있었다.


이들간의 공통점은 편했다는 것이다.

잘 쓸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해하기 쉽고, 친절하면서도, 구성이 찰지고, 남들과 차별화된 그런 글들을 써야 하는 지금엔 그렇게 블로그나 편지를 통해서 구구절절 풀어놓았던 '말들'이 다 사라진 느낌이다. 말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 말을 뱉어내야 하니, 말이 없어진 내가 그 참에 생각도 없어진 건가 싶고,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PD가 되려나 타박도 해본다. 문제, 혹은 글감을 받고 나면  몸을 배배 꼬면서 책상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은 걸 젖은 빨래뭉치마냥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뭐라도 끄집어내는 과정의 연속.


그런데 뭔가 도전의식이 생긴다.


이 기간, 시험기간, 가장 패배주의가 짙어지는 이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보내고 싶다는 도전의식. 


써야 하는 말을 짜내서 쓰는 게 아니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밑바닥에서 기어내서 나만의 정답을 쓰고 싶다, 생각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하루하루에 생각 좀 하면서 살고 싶다, PD가 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좋은 PD가 되려는 공부를 해야겠다, 는 도전의식. 이런 수많은 다짐들도 "아쉽게도 제한된 선발 인원으로 인해 향후 전형에 모시지 못하게 되었다"는 웹 페이지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 싶은 듯 자취를 감추고 말지만, 또 다시 찾아내야겠다. 당장 11월에 내가 뭘하고 있을지 분간할 수 없는 지금이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는 내 선택에 달렸으니까 말이다.


피로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고 말테니깐.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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