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은 사람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양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고, 어깨에는 팔을 끝까지 위로 들 수 없을 만큼 오십견이 왔으며, 무엇보다 너무나 우울해 보여 무슨 얘길 하건 간에 눈치를 봐가며 한 번 더 생각이란 걸 하고 말을 걸어야 했다.
가게를 운영하며 바쁜 데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일주일 중 딱 하루 쉬는 내 휴무 날에는 온전히 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친구와 같이 살고 있기에 해야 할 일들이 혼자 살 때보다 두세 배 많아졌다.
혼자만의 시간은 개뿔, 미뤘던 병원 진료를 보러 다니거나 일주일치 반찬을 만들거나 계절옷을 정리한다거나 하는 사사로운 일들은 둘이 사니 두 배는 더 늘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갱년기를 겪고 있는 엄마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한 가족 식사 자리에서 엄마는 뜬금없는 고백과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A한테 내 딸을 빼앗긴 것 같아."
친구는 당황해했고, 가족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급하게 수습하느라
"에구~우리 엄마가 많이 힘들었구먼? 내가 바빠서 신경을 못 써줬네.. 미안해~"라고 얼버무렸다.
친구와 같이 살기 전, 나는 엄마와 절친같이 붙어 다녔다. 내 모든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고, 엄마 또한 자식에게 못 할 말 까지도 내게 털어놓고 의논할 만큼 서로에게 무척이나 의지했고 모든 걸 함께 했었는데 가게를 하며 내가 바빠지고 친구와 함께 살면서 그 시간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니 서운해할 만했지만 다 있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서운함을 그것도 엄청나게 직설적으로 표현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눈에 띄게 살이 빠졌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모든 일에 의욕이 없었다.
마치 목소리를 잃은 작은 새 같달까.
"엄마, 일 끝나고 가게 잠깐 놀러 와~"
나는 목소리를 있는 힘껏 쥐어짠 후 일부러 한 톤을 높여 크게 말했다.
두 시간 뒤 영혼 없는 표정으로 엄마는 가게에 왔고, 사우나에서 늘 하던 동생 얘기, 아빠얘기, 온갖 과거 얘기를 토씨하나 안 틀리고 쉼 없이 뱉어냈다. 평소보다 조금 과하게 리액션을 하며 엄마얘길 받아주었더니 어느새 엄마의 텐션이 어느 정도 올라간 게 보여 안도감을 느낄 쯔음,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오셨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조금 더 있다가 가~"
"가야지, 내가 여기서 뭐 해.."
"그냥 앉아있어~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나"
"아니여.. 간다?!"
그렇게 애써 웃으며 나가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차라리 손님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에 밥이나 먹고 갔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장사를 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엄마보다 손님이 먼저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문을 열고 나가는 엄마를 난생처음 뒤에서 안아주려 하는 순간, 엄마는 뒤돌아 나를 밀쳐내며 짜증을 냈다.
"아, 왜 그래!"
순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갱년기 감정 기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느꼈다. 무안할 정도의 과한 반응.. 살면서 엄마가 나에게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화가 났다기보다 갱년기가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구나 싶었다.
엄마와 나이가 비슷한 건강원을 운영하는 손님에게 갱년기에 좋은 음식은 뭐가 있는지 여쭤봤다.
"아휴, 말도 마, 3년 전에 갱년기 세게 왔을 때, 난 진짜로 밥 먹고 있는 남편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더라니까?"
"사장님이 우리 사모님한테 잘못하신 게 많은가 봐요 ㅎㅎㅎ"
"아~~ 무 이유 없어 진짜~이상하게 남편 뒷모습만 보면 화가 난다니까? 엄마 칡즙 드셔보시라고 해봐~나도 칡즙 먹고 많이 좋아졌어~"
그날 이후, 갱년기에 좋은 것들을 하나씩 사다 날랐다. 갱년기 증상을 낮춰준다는 칡즙, 갱년기 여성 호르몬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석류, 갱년기 건강식품인 화애락 등등..
"왜 내 건 없어? 나도 영양제 좋아해~"
온통 엄마를 위한 것들만 계속 사다 나르니 아빠는 샘을 냈다.
"잘 생각해 봐, 엄마 갱년기가 빨리 지나가야 아빠가 평화로 울 것 같지 않아?"
"그건 그렇지"
"그럼 나 이거 나르는 것 좀 도와줘요"
옆에서 보고 있던 엄마도 한마디 했다.
"이봐, 역시 딸 뿐이야.. 당신은 생전 이런 거 사 올 줄 모르잖아"
"아 귀찮네 이거?"
듣고 있던 아빠는 서운함과 투정이 뒤섞인 척하였지만 내가 사 온 석류박스를 베란다 구석 서늘한 곳 한편에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는 반듯이 차곡차곡 쌓았다.
엄마의 갱년기는 하루 이틀 앓고 지나가는 감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60여년 세월 중에 가장 서럽고 힘들고 고된 날들이 모여 뜨거운 용암이되어 고여서는 마침내 활화산처럼 타는 열병 같은 것이다.
진하게 우려낸 몇 봉지의 칡즙이, 알알이 새빨간 보석 같은 석류 몇 알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열병.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산을 올랐다. 엄마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올 때면, 이곳에 와서 그렇게나 울었다고 한다. 여기에 와서 한참을 소리 지르며 울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셨다고 했다.
미우나 고우나 내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극단적 선택을 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며 내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삶을 걸어오며 무엇이 그토록 무거운 무게로 엄마의 가슴을 짓눌렀을까.. 바쁘단 핑계로 엄마를 챙기지 못한 내 공백이 엄마를 더 아프게 한 걸까. 마음이 너무나 아려와 콧날이 시큰 거렸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어야 지키고 싶은걸 더 잘 지킬 수 있을 거란 어느 손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 때문에 여태 버텼고, 죽어라 일했건만.. 마음의 병으로 말미암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엄마를 정작 돌보지 못했던 것 같아 죄스러웠다. 어쩌면 외면했던 것일지도..
남녀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나이가 들면 갱년기는 불시에 찾아온다.
다른 증상들은 있지만 감정기복은 거의 못 느꼈다는 분도 봤고, 나의 엄마처럼 우울감과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기 힘든 분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사람의 감정도 계속 같은 자리에 같은 강도로 머물 순 없다.
슬픔도, 우울과 불안함도 모두 언젠간 괜찮아진다. ( 괜찮은 척이 가능해진다.)
다만 그것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한다면 조금 더 빨리 이겨낼 수 있다.
갱년기가와 불면증에, 우울증, 오십견에 시달리고 마음이 동남아 날씨처럼 흐렸다 맑았다 변덕을 부리며 말도 안 되게 생떼를 부리는 아이처럼 변한대도 , 분명한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