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수만 군사의 칼보다 더 날카로웠던 관기(官妓), 논개

by 예지리파파

논개는 ‘관기(官妓)’였다. 잔치에서 흥을 돋우는 역할이 아닌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기생이었다. 조선의 수천, 수만 명의 군사가 하지 못했던 일을 그녀는 무장 하나 없이 홀로 적장(敵將)을 죽였다. 그녀는 어떻게 적장을 죽일 수 있었을까. 비무장으로 당당히 나선 그녀는 조선의 누구보다 굳은 각오와 결연한 의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용기가 있었다. 날카로운 칼끝보다 부드러우면서 매서운 살기로 적장의 숨통을 끊었다. 그녀의 살기는 창, 칼, 활보다 확실히 부드러우면서 강했다.


전쟁에서 적군의 영역을 점령하거나, 적군이 공격해 올 때 방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군사들의 사기와도 연결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똑똑한 지휘관과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잘 짜인 작전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치열한 전투 중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며, 상대의 수장을 포획하거나 사살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그 하나를 이루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의 병력이 희생된다. 때로는 그렇게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루지 못할 경우가 수두룩하다.


선조 25년 임진년, 1592년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 최고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침략하기 위해 조선을 지나가겠다고 했다. 조선은 단호히 거절했다. 선조는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수 36명에게 병사 20만여 명을 내주며 조선을 침략하게 했다. 왜군은 4만여 척의 배로 부산을 침략했다. 왜군은 ‘조총’이라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앞세워 다대포 전투,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제압했다. 왜군은 그 기세를 몰아 빠르게 조선을 점령해 나갔다. 5월에 한성이 점령당하며 조선은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1592년 10월, 임진왜란 중 경상도 남부의 전략 요충지 ‘진주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있어 적이 공략하기 힘들었다. 왜군은 부산을 시작으로 야금야금 조선 땅을 먹어 치우며, 급기야 진주성에 다다랐다. 왜군은 전승의 기세를 몰아 진주성마저 점령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있었다. 김시민 장군은 의병과 관군 3,800여 명으로 왜군 3만여 명을 물리쳤다. 하지만 김시민 장군은 전투 중 왜군이 쏜 조총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 며칠 뒤 전사했다. 이 전투가 ‘1차 진주성 전투 또는 진주대첩’이라고 한다.


260314 진주 촉석루 (5).jpg 가로로 뻗어있는 진주성


이듬해 6월, 김천일 의병장이 3,600여 명의 군사와 각지에서 모인 여러 장수와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왜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 패배를 상기해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왜군은 1차 전투와 달리 심리전과 화공(火攻)을 펼쳤다. 진주성은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왜군에게 함락당했다. 전투에서 패배해 군사는 물론 성내에 있던 많은 백성을 포함해 7만여 명이 전사했다. 진주성 전투는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막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전투였다. 전라도는 곡창지대로써 군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 전투를 ‘2차 진주성 전투’라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군은 최고로 사기가 높아진다. 그 사기는 다음 전투에서 쓰일 전투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투에 임했던 군사와 장수들은 술과 많은 음식으로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해 보상받는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왜군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성 내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260314 진주 촉석루 (26).jpg 진주성 촉석루


연회가 열리는 촉석루에 많은 왜장이 모였다. 그리고 술과 여러 음식이 준비되었다. 그뿐 아니라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관에서 운영하던 기생들도 동원됐다. 연회가 무르익고 많은 술이 왜장들의 정신을 흩트리기 시작했다. 한껏 분위기에 취해있던 왜장들이 장수의 꼿꼿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하나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연회장에 동원되었던 관기 중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눈여겨봤다. 논개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기 직전인 그를 촉석루 아래 넓은 바위로 유인했다. 그는 논개에게 이끌렸다. 논개는 적장의 명(命)은 오늘까지라고 살기를 보내며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리기로 다짐했다. 논개는 열 손가락에 낀 가락지가 벗겨지지 않게 다시 꼭꼭 밀어 확인했다. 그리고 가파른 바위 끝까지 다다른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260314 진주 촉석루 (16).jpg 진주성 촉석루 아래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린 의암


논개는 조선의 의기(義妓)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린 진주 기생 논개의 이야기다. 그 외 논개에 대해 다른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논개는 단순히 기생으로만 알려졌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논개는 1574년 9월 3일 전라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성은 주(朱)씨, 이름은 논개(論介)다. 논개는 서당 훈장이었던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둘만 남아 숙부의 집에서 생활했다. 숙부는 지인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금품을 챙겨 도망갔다. 논개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갔다.


260314 진주박물관 (5).jpg 국립진주박물관 논개 초상


며느리를 받기로 한 집에서 논개가 도망간 것을 알게 되자 관청에 고했다. 관청에서 논개와 어머니를 체포해 가뒀다. 이 일로 논개와 어머니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장수군 현감이던 ‘최경회’가 맡았다. 재판 결과 모녀에게 무죄가 내려졌다. 하지만 모녀는 돌아갈 곳이 없어 ‘관비(官婢)’를 자청해 관아에서 지냈다. 관비로 지내던 논개는 현감을 따라다니며 현감을 수행했고, 나중에 그의 ‘부실(副室)’이 되었다. 최경회는 의병장이 되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서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 이 무렵 논개도 남편을 따라 장수에서 진주로 따라갔다.


최경회는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책임감을 통감하여 자결했다. 오직 남편만을 보고 고향을 떠난 논개는 남편을 잃게 되었다. 논개는 남편의 죽음으로 남편의 원수와 조국의 원수를 갚겠다는 큰 뜻을 품었다. 그녀는 결국 기생으로 가장해 왜군들이 벌인 연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술에 취해있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논개가 뛰어내린 바위는 ‘의암(義巖)’으로 불린다.


260314 진주 촉석루 (19).jpg 진주 남강 의암


논개는 촉석루에서는 기생이었지만, 기생이 아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 있는 삶을 살며,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몸소 깨달았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육체에서 나오는 힘은 없었으나, 정신에서 나오는 힘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논개의 희생은 조국에게도, 적국에도 큰 충격이었다. 훗날 조선 21대 임금 영조는 촉석루 내에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를 세우고, 사액을 내렸다. 논개가 뛰어내린 의암에는 논개의 사적을 담은 ‘진주의암사적비’가 있다.


260314 진주성, 촉석루, 의암바위 (28).jpg 진주 남강 의암 '진주의암사적비'


수만 명의 관군도 하지 못한 적장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19세의 한 관기가 해냈다. 그녀는 창, 칼, 활의 날카로움보다 정신에서 나오는 굳은 의지를 가졌기에 해낼 수 있었다. 논개의 순절은 남편과 조국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최고의 결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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