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데이비드 호크니 : 색채를 통한 회복의 여정



1. 캔버스에 펼친 억압과 해방의 이야기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왜 이 오만한 영국인이 21세기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리는 듯 합니다. “난 그냥 나로 살 거야. 그러니까 신경 끄라고.” 그리고 그의 ‘나다움’에는 퀴어로서의 정체성, 외로움, 그리고 눈부신 치유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937년, 영국 브래드포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난독증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선 ‘머리가 좀 모자란 애’ 취급을 받았죠. 하지만 어머니 로라는 달랐습니다. “넌 특별한 아이야, 데이비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마법 같은 말이었죠. 그 말 한마디가 평생을 지탱하는 힘이 됐습니다.

hknn.png?type=w773


호크니는 왕립 예술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예술을 시작했습니다. 근데 문제는, 당시 영국이 그에게 감옥 같았다는 거죠. 60년대 초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이었고, 숨죽여 살아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유일한 방법은 캔버스뿐이었죠.


그는 '우리 두 소년이 함께 있다(1961)', '제3의 사랑 그림(1960)' 같은 작품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욕망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근데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 순 없었습니다.

dh4.png?type=w773 We Two Boys Together Clinging 1961


그래서? 호크니는 1964년 LA로 날아갔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숨통이 트였죠. “여기가 바로 나를 위한 곳이구나.” 태양, 자유, 그리고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 천사들의 도시. 출애굽기의 현대판이라고 해도 될 수준이었죠.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색감이 폭발합니다. ‘닉의 수영장에서 나오는 피터(1966)’나 ‘더 큰 첨벙(1967)’ 같은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반짝이는 물, 부드럽게 떨어지는 그림자, 완벽하게 균형 잡힌 남성의 신체.

pgp.png Peter Getting out of Nick's Pool. 1966
SE-bf82ad77-82fd-47ae-993e-006cf9beb088.png?type=w773 A Bigger Splash 1967


이 작품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자유의 선언이었죠. “그래, 난 이제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


LA에서의 삶은 달콤했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습니다. 인간관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거든요. 진짜 연결을 원했지만 자주 삐걱대곤 했죠. 이런 기분은 '이중 초상화' 연작에서 표현됩니다.

dp.png?type=w773 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그림 속 인물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친밀하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 뭔가 아프죠?


70-80년대에 그는 새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조이너(joiners)’ 시리즈에선 현실을 조각내고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파편화된 정체성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였죠. 이 작품들은 여러 관점과 순간을 동시에 보여주며,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줍니다.

dh7.png?type=w773 Pearblossom Highway, 11-18th April 1986 #2


1980년대 호크니는 에이즈로 많은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색채는 어둡게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죠. 그는 고향 요크셔로 돌아가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 대신,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을 보며 위로를 찾았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어머니와의 관계입니다. '어머니의 자화상(1985)'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2000년에 세상을 떠났죠.


SE-e6fbfc4b-603b-441b-98d5-fa234f83b78b.png?type=w773 Portrait of Mother 1985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붓을 들었습니다. 예술은 그의 생존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2012년, 그의 조수 도미닉 엘리엇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호크니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한동안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번엔 아이패드를 들고 말이죠.


지금, 80대가 된 그는 여전히 창작을 멈추지 않습니다.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새로운 풍경을 그리고 있죠. 그의 최근 작품을 보면 색감이 여전히 강렬합니다.





2. 색채의 심리학


자, 이제 호크니의 작품을 심리상담사의 시선으로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미술이란 결국 작가의 속내가 묻어나는 법이니까요.


호크니의 초기 작품을 보면 색감이 절제되어 있습니다. 차분한 회색, 어두운 파랑, 조용한 베이지. 진짜 나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어, 라는 느낌.


당시 영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던 그의 심리 상태가 색채의 제한으로 나타난 것이죠.

nd.png?type=w773 Nude 1957


LA로 이주한 후 색채가 달라진 것은 단순히 환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되었던 욕망의 표현이었죠. 밝은 청록색, 강렬한 분홍색, 눈부신 레몬색이 그의 캔버스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폭발하는 색채, 범람하는 해방감.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색채의 변화로 나타난 겁니다.

SE-5f4b404b-b7ed-4196-b05b-28b4036c9e09.png?type=w773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1


수영장 시리즈에서 물은 그의 내면세계를 상징합니다. 물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형태가 없으며, 빛을 반사하고 굴절시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한 감정이 공존하는 우리 내면과 닮았습니다.


특히 물빛을 묘사하는 방식은 내면 깊숙이 감춰두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중 초상화. 그는 인물들 사이에 항상 거리를 둡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자신을 잃을까 봐, 너무 멀어지면 외로울까 봐.

dh5.png?type=w773 Shirley Goldfarb & Gregory Masurovsky 1974


이거 완전 연애할 때 우리가 하는 짓 아닌가요? "사랑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게, 적당한 거리 유지하기." 양가적 감정의 공존. 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네요.


다중 시점을 시도한 것도 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는 단일한 관점이 아니라, 다채로운 시각에서 현실을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관점으로요.


하나의 진리, 하나의 답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아가는 모습이죠. 우리 인생처럼. 단 하나의 정답 같은 건 없다는 듯이.


그리고 요크셔 풍경화. 이건 단순한 자연 그림이 아닙니다. 상실을 겪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려는 몸부림이죠.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지만, 자연은 여전히 거기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붓을 들었습니다. 그게 호크니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었죠.

yks.png?type=w773 Steep Valley Kirkby Underdale 2006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심리적 주제는 '연결에 대한 갈망'입니다.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 모두 세상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를 담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깊이 경험했던 그는 예술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외로움은 오히려 더 깊은 연결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상실과 고립이라는 어둠을 경험하면서도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죠. 이는 상처를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보여줍니다.

dh1.png?type=w773 데이비드 호크니


그의 예술은 단순한 직업적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내면의 상처를 보다듬는 과정이었습니다. 강렬한 색채, 다양한 시점, 친밀하면서도 거리감 있는 인물 묘사, 즉 자신의 내면과 화해하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시도말입니다.





3. Life goes on


호크니의 이야기는 희망과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초라한 영국 소년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한 그는 억압, 고립, 상실을 경험했지만, 결코 예술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위대한 예술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어둠을 몰아낸 그의 작품처럼 말입니다. 강렬한 핑크색, 활기찬 청록색, 오렌지 빛의 정열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삶은 계속된다." 라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