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피
볕이 좋은 날 사무실에 앉아 오롯이 모니터만 마주하던 날을 기억한다. 창문을 넘어 햇살이 들이쳐도, 나는 문밖을 나설 수 없었다. 미뤄두지도 않았으나 만들어야 될 이미지며, 진행해야 할 프로젝트가 밀려있던 탓이다. 아침에 잠깐, 점심에 잠깐, 양지에 머무르길 좋아하는 나는 한동안 낮과 멀어지고 밤과 가까워졌다.
입사와 함께 게임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부터 가기 싫은 곳을 딱 하나 고르라면 PC방을 골랐었다. 내가 게임을 못하기도 했다만, 같은 공간에서 기계처럼 모니터만 보고 있는 게 그렇게 싫었던 탓이다. 그때 생애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어느 날은 퇴근하자마자 7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죽은 듯이 앉았던 기억이 난다.
일전에 TV프로그램에서 먹방을 본 적이 있다. 한 탤런트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고기를 많이 먹어요? 질리지 않아요?”라고 물었는데, 답이 명쾌했다. “어떻게 질려요. 먹는 방법이 이렇게 다양한데!” 게임을 오래 하는 방법도 똑같다. 두세 가지 게임을 돌려가며 하면, 절대 질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남들은 학창 시절에 거쳤을 일을 나는 20대 후반에 지나고 있었다.
말과 눈빛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어가 거칠고, 눈은 생기가 없어 보였는지 “요즘 많이 힘들어?”라고 묻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오늘내일을 별로 기대하지 않다 금요일에 잠깐 행복했다. 그래봤자 늦잠에 게임이나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게 좋았다.
어느 금요일 퇴근길, 유튜브에서 클립영상을 봤다. ‘스물다섯스물하나’ 라든가, 펜싱을 주제로 만든 성장드라마라니, 평소 큰 관심이 없었던 배우들에 ‘진부한 성장드라마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인지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오늘 돌이켜보니 스물다섯의 내가 스물일곱의 나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싶다. 모니터 앞에서 하루를 몽땅 보내던 스물일곱의 나와는 달리 스물하나, 스물다섯의 나는 나름 빛났으니 말이다.
드라마를 보는데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모든 시간을 다 썼다. 플레이리스트에 연주곡까지 모든 OST를 넣어두고 한동안 듣고 다니고, 김태리 배우의 브이로그를 매주 기다리며 찾아봤으니 내가 얼마나 빠져있었는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너 정말 그 일 사랑해?’ 드라마가 내게 남긴 질문이었다. 펜싱이 좋아서 죽어라 사랑하는 주인공, 펜싱 때문에 좌절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도저히 숨쉬기가 불편하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10,000시간의 법칙이라고, 뭐든 만 시간을 하면 전문가가 된다더라. 내 인생의 10번의 해넘이를 모니터와 보내고 싶지 않았다. 뭐든 잘 해질 거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직서를 내고 퇴사하게 된 그날, 나는 상담을 공부하기로 했다. 상담으로는 실패해도 행복할 거라는 확신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책을 다시 집었고, 글을 다시 적었다. “성빈이 눈에 총명함이 돌아온 것 같아.”라는 말로 한동안 일어섰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컴퓨터와 멀어지고, 책과 가까워졌다.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온 삶이 새삼 반갑다.
게임을 오래 하기 위해 이것저것 돌려했던 잔머리를, 책을 읽는데 쓰기 시작했다.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면 혼자 읽기 버거운 400페이지의 책도 뿌듯이 읽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요즈음은 혼자 알기 아쉬워서 이것저것 만들어보고 있는데, 적잖이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다. 때로 무기력이 나에게 찾아올 때면, 나는 그날의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사랑하는지, 오롯이 행복한지 말이다.
책을 읽다 갈피에 종이를 꽂아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읽으려 한다. 천천히, 오래도록 사랑하기 위함이다.